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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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영원한 충청인’ 병천 순대 이강원 사장

2015-05-2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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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의 맛 떠올리고 힐링받고 ...그게 식당이죠”

허리 부상으로 국가대표 운동선수 꿈 접고 사업가 길로
생선가게 허드렛일부터 시작...“고객을 가족 대하듯” 경영철학
분열된 고향사람들 모아 충청향우회 조직, 지역사회 봉사도 열심

“나는 충청도를 좋아한다. 어머님과 옛 친구들이 고향에 있기 때문이다”

매년 고향에 가면 그리운 어머님이 살고 계신다. 반겨주는 친구들도 있다. 어린 시절 사과서리, 예당저수지에서 고기 잡아 어죽 끓어 먹던 추억은 언제나 가슴 한 곳에 담아두고 살아간다. 비록 몸은 뉴욕에 있지만 항상 고향을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고향의 명물 ‘병천 순대’ 해외 프랜차이즈 1호점을 뉴욕에 직접 차렸다. 그는 ‘영원한 충청인’을 자랑스러워한다. 주인공인 병천 순대 이강원(58) 사장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내 고향은 충청도

그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1957년 산 닭띠다. 파출소장 아버지의 2남2녀의 장남이자 셋째다. 어린 시절 장래 희망은 국가대표 운동선수. 경찰공무원인 아버지의 유도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보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태권도 검은 띠. 초단의 실력을 갖췄다. 중학교 때는 운동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이사를 자주한 이유다. 고등학교 때 다시 유도를 시작했다. 국가대표 선수를 꿈꾸며 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다 고교 3학년 초에 운동하다 허리를 다쳤다. 결국 국가대표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고향은 떠나 뉴욕에 살지만 충청도 사랑은 변함이 없다. 여러 갈래로 분열된 고향사람들의 모임을 하나로 합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통합된 ‘미동부 충청향우회’의 초대회장도 맡았다. 회장을 맡아 충청도 출신 동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향우회를 재정비하고 새롭게 출발했다. 분열과 반목으로 충청출신들의 외면과 한인사회의 비난을 자초한 지난 시간을 깔끔하게 정리한 것이다.

이미지 쇄신을 위해 600여 명의 노인들을 초청해 바비큐와 경로잔치 행사도 마련했다. 충청남도 공예품 뉴욕방문 등 고향사람들의 미주진출에도 적극 협력했다. 병천 순대의 비법을 한국에서 직접 배워와 뉴욕에 해외 1호점을 차렸다. 병천 순대는 충청도 천안시가 30억 원이란 사업비를 투자해 추진하는 웰빙 명품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전역 프랜차이즈화를 계획하고 있으며 맨하탄과 뉴저지 진출도 꾀하고 있다.

그는 병천 순대의 특징으로 옛 장터에서 말아먹던 순대 국밥의 맛을 그대로 살린 천안의 대표 음식으로 손색이 없고 잡채 대신 야채와 선지가 많이 들어간 담백한 맛을 꼽는다. 또한 어느 집보다도 맛있다고 자부하는 즉석 철판구이를 내세운다. 돼지 주물럭, 옛날 불고기, 쭈꾸미·오징어 등 한국에서 온 재료들을 골고루 버무려 테이블에서 바로 볶아낸 철판 요리들을 다 먹고 난 후에는 볶음밥까지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식당은 음식 맛이 일정해야 한다. 한국에서 모든 요리의 비법을 직접 배워온 이유다. 모든 비법을 주인이 알고 있으면 주방이 바뀌어도 맛이 똑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대뿐 아니라 모든 메뉴에 내 가족을 향한 정성을 고스란히 쏟아서 보다 저렴하고 맛있는 요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선에 울고 웃고


그는 5사단 육군병장으로 제대한 뒤 1980년에 집안 형님과 전자회사를 설립했다. 한국 최초로 가라오케를 제작했다. 하청 받아 일반 전화기도 만들었다. 하지만 IMF를 겪었고 가라오케 제작실패로 1989년 초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 해 미국 시민권자와 중매결혼을 하고 뉴욕으로 도미를 결정했다. 그 때는 ‘다시 군대 가는 마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는 심정이었다.

그가 미국 올 때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은 생선가게 주인이었다. 그 인연으로 새 살림을 차린 스태튼아일랜드에서 1주일 만에 생선가게 허드레 일을 시작했다. 하루 12시간 주 6일 일했다. 남미 사람 밑에서 생선과 오징어를 클린하고, 생선도 튀겼다. 생선클린을 위해 가위질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20-30분 동안 꼼지락 거리며 손가락 운동을 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차가운 바닥에 흩어져 있는 생선내장을 손으로 집어 버릴 때에는 서러운 마음에 가슴 속으로 울기도 한참 울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일을 하다 브루클린 지역의 생선가게로 옮겼다. 그 곳에서는 허드레 일이 아닌 생선 플랫 뜨는 것 등 다양한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좋은 주인을 만난 덕분이었다. 당시 윤 사장님은 지금도 존경하고 가장 좋아하는 가장 멋진 사람으로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다. 1년 정도 생선 관련 일을 더 배운 뒤 퀸즈 메스페스에 ‘그랜드 피시’ 생선 가게를 차렸다. 6년 동안 가게를 운영했다. 그 때는 풀턴어시장를 다니며 수산인 협회 선후배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며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는 호남선배들이 많아 호남향우회 골프대회 준비 위원장도 맡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호남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귀띔한다.

그는 생선가게를 운영하다 주방 요리도 배우게 됐다. 규모 확장을 위해 1997년 웨체스터 와잇플랜에 위치한 30년 전통의 ‘Sea World Seafood’를 인수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곳은 생선뿐만 아니라 샐러드 바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주방요리를 새롭게 배운 뒤 직접 주방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콜, 핫 푸드 100여개의 아이템을 직접 만들었다. 바비큐 요리에 대한 실력도 쌓았다. 그렇게 쌓은 노하우 덕분에 2004년 플러싱에 동해수산을 자신 있게 개업할 수 있었다. 동해수산은 신선하고 다양한 생선위주로 고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비결은 생선회에 곁들여 나오는 새로운 메뉴와 특별 요리 등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배운 요리 실력에 끊임없는 아이템 개발이 낳은 결과다. 그는 매년 한국에서 잘하는 횟집을 둘러보며 새로운 메뉴개발을 위한 아이디어를 찾아다녔다. 지금은 플러싱 동해수산이 신축문제로 재 개업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올 해 안에는 다시 그 맛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이라도 2008년에 뉴저지에 진출한 동해수산에 가면 그리운 그 맛을 만날 수 있다. 생선구이에 초밥과 함께하는 정식을 런치스페셜로 즐길 수도 있다. 재료를 활어만으로 쓰기 때문에 맛이 일품이다. 뿐만 아니라 신선하고 다양한 생선위주로 고객들의 입맛을 충족시키며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메뉴도 선보이고 있다.
그는 “이민초기 생선가게에서 허드레 일을 할 때는 참으로 서러워 많이 울었지만 지금은 생선으로 고객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으니 웃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식당주인이 천직

그는 식당은 하나의 경영이라 누구나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하고 뛰어들어서는 망하기 십상이라고. 구체적인 계획 없이 접근하면 결코 쉽지 않는 것이 먹는장사이기 때문이란다.

옛날에는 식당주인이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직업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먹거리 세상이다. 존경 받는 요리사들이 많은 것처럼 식당주인도 떳떳하게 자신을 내 세울 수 있는 세상으로 변했다. 그렇기 때문에 식당주인은 움츠리지 말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식당은 사람의 생명에 직결된 음식을 파는 곳이라 주방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주방장에게 늘 가족들에게 주듯 음식을 정성껏 만들도록 철저한 교육을 시키는 이유다. 가족처럼 지내는 종업원들에게는 고객을 내 부모님처럼 예의바르게 대하고 가정에서 식구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듯 정성과 친절을 다하라고 이른다.

그는 식당은 장사만 하는 곳이 아니라 고객과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도움이 돼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돈만 버는 데 급급하지 않고 쓸데는 꼭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평상시 갖고 있는 삶의 철학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갑내기 모임인 닭띠동우회 초대회장 당시 회원들과 먹자골목 행사와 추석맞이행사 등에서 음식장사로 마련한 수익금을 노숙자들에게 전달한 것도 다 그런 이유다.
그는 식당주인을 자신의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식당을 계속할 생각이다. 향토 냄새 물씬 풍기는 충청도 고향의 음식을 뉴욕에 꾸준히 소개할 계획이다. 친구들과 함께 뷔페 음식점 개업도 준비하고 있다.

뉴욕일원 한식당 음식의 품질 개선과 한식 세계화와 관련된 각종 사업 진행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식당주인이라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긴다. 그래서 한식세계화추진위원회 이사장 역할도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

그는 건강의 문제는 음식을 잘 못 먹는 데서 오고 질병은 음식을 잘 섭취하면 치유될 수 있듯이 좋은 음식을 잘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음식을 고객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제공하는 데에서 식당주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 말미에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평범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 말하는 그에게서는 느린듯하지만 꼼꼼한 충청인의 향토적인 향기가 물씬 풍겼다.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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