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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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네티컷/ 칼럼:경계(境界)에 서서 길을 묻다.

2015-05-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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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전 한인회장>


비가 지나간 하늘이 유난히 높아 보인다. 마른 가지에 부지런히 물을 길어 올리며 조금씩 생명을 잉태하던 숲에서는 어느덧 어린잎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펼쳐 하늘을 가리기 시작했다. 비를 따라 온 바람 탓에 기분 좋게 흔들리는 가지위에서 잠시 앉아 숨을 고르던 새가 인기척에 깜짝 놀라 파란 하늘로 날아갔다.

창밖의 자작나무에 바쁘게 오르내리던 작은 다람쥐 두 마리가 사이좋게 땅에 내려와 흙냄새를 맡는다. 생명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초록의 계절이 된 것이다. 긴 겨울을 지내며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뜨거운 햇살 아래 번지는 땀을 닦아내며 가을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에 귀 기울이는 시간에도, 우리는 늘 그 무엇인가를 아쉬워하며 경계(境界)에 서서 이렇게 길을 묻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천재 화가 ‘안견’이 그렸다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감상을 읽은 적이 있다. 화폭 속의 오른쪽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환상적인 천상의 모습이고, 왼쪽은 낮은 자세로 관망하듯 바라본 일상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크고 기이한 모습을 한 바위산이 있는데. 두개의 큰 바위 사이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무(無 )의 세계가 느껴지는 듯 해 두려운 마음까지 생긴다고 쓰여 있었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본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는 사람으로서, 한국 미술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으니 그림을 눈앞에 두고 보면서도 같은 마음이 되어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몽유도원도’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경계’라는 말이 떠오르게 되었다.

그림 속의 바위산을 천상과 일상의 경계이자 고통의 세계로 본 평자의 자유로운 시선에 놀랐던 기억이 있어서일 것이다. 하여 ‘경계’에 대한 말에도 각자가 가진 가치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아둘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기서 ‘경계(境界)’라 함은 ‘사물이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를 말한다.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지점이 꼭 공간의 개념이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도로의 중앙선처럼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되는 곳일 수도, 혹은 기차의 연결 칸처럼 그곳을 지나야 비로소 경계의 의미가 생기는 곳일 수도 있겠지 싶다.

그러나 어쩌면 제주도의 돌담처럼 경계를 세워 안과 밖을 구분하면서도, 바람이 지나가는 틈을 만들어 안과 밖이 안전하게 하나로 연결되니 시작점으로서의 역할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곧 졸업시즌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학교 문을 나서야하는 신입 사회인들에게는 넘어서야 할 경계가 두렵게 느껴지는 출발선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곳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란 의미는 아닐 것이다.

경계는 밖에 놓여 있는 상황과 현실을 동시에 모두 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언제까지나 경계 위에서만 지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능성을 가능성인 상태로만 둔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의 경계점에 서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빛과 그림자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인지 말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내 곁에 그림자가 생기고 있다는 사실, 또는 나에게 빛이 비추어지고 있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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