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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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초대/ 불광선원 주지 휘광 스님

2015-05-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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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불교 조계종 미동부해외특별교구장

▶ 뉴욕 땅에 자비를...영어권 불교인재 양성에도 한 몫

2009년 큰법당 완공 불자들 한자리에...한국불교의 세계화 이끌어
어린이.중.고등부.청년회 등 각각 법회 진행 체계적으로 운영

한국불교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지금 뉴욕 업스테이트 태판에 가면 데코레이션 연등이 방문객을 화사하게 맞아주고 큰 법당 안 공양 등은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불광선원 주지 휘광스님을 만나본다.

▲큰 법당 시대 열어
5월25일(음력 초파일) 불기 2559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5월 한달 여러 곳에서 불교행사가 열리고 있다. 미국 땅 뉴욕에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부처님 마음이 전해지기까지 불광선원은 어떻게 개원됐을까.


“나이 40이 다되어 1991년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 1991년 4월 10일 뉴욕 원각사에 입방한 후 그해 9월부터 1994년 7월까지 원각사에서 1,000일 관음기도를 올리며 불광선원 창립을 기원했다. 1994년 9월부터 1년간 맨하탄 컬럼비아 대학 어학연수를 하고 96년 뉴욕 정명사 창건시 힘을 보탰고 그해 7월1일 뉴욕 태판에 불광선원을 개원했다.”

불교신자는 있지만 법회를 볼만한 사찰이 없던 시절, 휘광(輝光)은 뉴욕·뉴저지 일대 불자들이 모이는 가정법회부터 시작했다. “원각사 시절부터 20가구, 30명 정도 참여했는데 6개월이 지나자 50~60명, 3~4년이 되자 신자수가 90~100명으로 늘었다. 불광선원이 개원하면서 신자수가 300명으로 늘어나고 좀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 2001년~2004년 신축 큰법당 건립을 위한 1,000일 자장기도를 봉행했다.

현재 관음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1772년 건립된 역사적 고옥으로 한국학교가 열리고 절밥을 지어내는 곳이다. 사적지이고 환경청 늪지 보호지역이라 큰법당을 짓는데 제약이 많았다. 7년간 보드 미팅에서 수십 차례 건의하고 논의한 결과 2008년 4월 큰법당 착공을 시작, 2009년 5월에 완공했다”

▲한국불교의 세계화
휘광은 큰 법당뿐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2001년 3,000명이상이 사망한 9.11 테러가 일어났다. 그분들의 영령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지장기도를 올리는 한편 뉴욕 원각사에서 관음보살 기도를 올렸다.” 일요일이면 650여명의 신자들이 법회에 참여한다. 매주 월요일 오후7시에는 이웃주민 20명이 모이는 명상프로그램이 열린다.

“현재 4명의 스님이 뉴욕불교신도회, 일심회, 장학회, 상조회, 동호회, 청년부 중고등부 들을 지도하고 비구니 스님 2명은 어린이부, 불광한국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1997년 개설한 불교교양대학은 불교 기본 교리 등을 가르치고 요가 참선반과 템플 스테이, 여름불교학교도 운영하는 한편 한인 건강상담과 사찰음식 요리강좌도 열린다. 1998년 9월에는 뉴욕일원 6개 사찰과 연합된 뉴욕불교사원연합회를 창립, 회장으로 활동했다.

휘광은 2011년 불교 조계종 미동부 해외특별교구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 ,700여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불교가 미동부 해외교구의 시작으로 국제포교 활동에 적극 나선 것이다. 미동부교구는 뉴욕, 뉴저지를 중심으로 미동부 16개주와 캐나다 동부지역의 6개주를 관할하며 경전이나 사경문·한글학교·지역불교방송·해외파견승 지원 등 행정과 운영에 협력하며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기여한다. 이로써 불광선원 주지는 한국의 통도사, 해인사의 주지와 같은 동급으로 인정됐고 휘광은 한국에 1년에 1~2번 나가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휘광스님, 미국에 오다
속세에서 휘광은 ‘대학을 중퇴’한 것으로 알려진다. 1972년 관악산 삼막사에서 ‘지환’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그 해 2월부터 행자생활 2년 당시 삼막사 최고어른인 ‘한 운암’ 큰스님께 동·서양의 철학과 석가의 가르침인 ‘사교’, ‘대교’를 직접 수강, 이수한다.

1974년 1월 15일 사미계, 1975년 10월 비구계를 수지, 1974년~1976년 2월까지 통도사 극락암과 오대산, 상원사 등의 제방선원에서 4안거를 원만성취 하였다. 본래 법명(法名)은 석원이었으나 나이 40이 넘어서 당호(幢號)인 휘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6년 3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 입학, 1978년 8월 중퇴후 79년 삼막사 총무, 1980년 대한불교 청소년 교화연합회 청소년담당 상임법사를 역임했다.
1981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선학과에 입학, 1985년 2월 졸업했다. 3월부터 경기도 안양시 용화사 주지 대리 역임 후 1986년 6월 충주 월악산 덕주사 주지를 지냈다. 1988년 5월 경기도 용인 백련사 주지, 1990년 수원포교당(현 수원사)상임법사 역임한 후 미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불교가 발전을 못했다. 불경이 한문으로 쓰여 언어적 문제에다 출가후 개인 수행에 치중하다보니 포교보다는 철학과 종교로 깊이 들어갔다. 국제 포교에도 대화할 수 있는 언어 체계가 부족하다보니 1990년대초 스님들에게도 영어 폭풍이 불어 닥쳤다. 내가 미국에 먼저 들어왔고 절을 운영하고 있으니 후배 스님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재정적 여건이 열악한 한국의 작은 사찰에서 미국에서 공부시키기는 어렵다. 1998년부터 동국대 후배 등이 미국에 와서 불광선원에 머물면서 6개월~1년간 공부를 했다. 일요법회에서 2세들을 지도하는데 현재도 3~4명의 스님들이 있다”

이는 영어권의 불교 인재 양성과 어려운 학생을 돕고자 60세이상의 노보살로 구성된 일심회 장학금이 뒷받침한 덕분이다. 대표적으로 프린스턴대 박사출신 혜민스님은 올 3월 문을 연 서울 인사동 불광선원 한국지부에서 명상치유프로그램을 열고 있고 하버드대 박사로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인 일미스님, 그 외 수십 명의 스님들이 영어연수와 일반 공부를 한 후 각 분야 중진으로 활동 중이다.

▲기도를 세게 하는 사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역시 재정적 문제이다. 큰법당을 짓기 위한 1,000일 기도회 당시 새벽 5시부터 6시까지 새벽기도, 낮 11시~12시까지 하루 두차례 기도회를 열었다. 목탁 소리 나는 사찰, 기도를 세게 하는 사찰로 소문이 나면서 신자들이 더욱 몰려들었다.”

오는 24일 오전 11시 큰법당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불광선원 법요식 및 관불의식이 열린다. “이날 2부순서로 어린이반부터 중고등부, 청년부, 일심회, 산악회... 모두 모여 장기자랑을 한다.”며 휘광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60년대, 70, 80년대에 이민 온 분, 최근 이민 온 분들이 다 특색이 있다. 60년대에 이민 온 분은 스님이 차를 몰아요 하고 놀라는데 탁발승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90년대에 이민 온 이들은 불교 교육이 어느 정도 되어있어 음식 봉양이나 후원회 봉사활동을 앞장서 잘 한다.”

휘광은 요즘의 불교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며 ‘젊은이들이 일을 하려면 고기도 좀 먹어야 한다“는 열린 사고방식을 지녔다. ‘불경에 나온다. 직접 살생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지 고기를 먹지 말라고는 안했다’는 휘광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 먹지 않을 뿐이라고 한다.

▲한국불교의 포교를 위해
“불교는 첨단과학과 가장 가깝다. 불교의 유심철학은 매우 풍부한 사상적 보고이다. 초월심리학은 일반 심리학과 영적인 체험 영역을 통합하는 학문이다. 감각기관에 의지한 오식에서 육식인 의식(意識), 더 나아가 칠식인 말나식(末那識)에 이어 팔식이 되면 생사의 세계인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 열반의 경지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게된다”

휘광의 말은 업(業, Karma)-현생을 기준으로 현생의 업을 주어지게 한 전생, 현생의 업이 결과에 따라 주어질 후생을 연결짓는 고리인 인과응보-를 벗어나려면 명상과 기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속세 나이는 물어선 안되지, 나야 항상 20대지. 한인 불자들에게 부처님을 향한 신념을 뚜렷이 간직한 채 살다보면 경제적 불황도 지나가고 꾸준히 기원하면 반드시 이룰 것이고 마음의 평화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한인들을 위한 한마디도 잊지 않는 휘광, 기자가 카메라를 잡자 “조폭처럼만 찍지 마시우” 농담도 잘 하고 화통한 성격이 환한 햇살과 함께 조화롭기 그지없다. 기분좋은 아침이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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