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5일(2015), 내가 봉직하는 오이코스 대학 채플 설교 차례가 되어, 마침 한국의 기념일인 ‘어린이 날’이기에 “어린이와 예수”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 워낙 짧은 20 분의 설교였던 지라 못다한 말이 많았기에, 좀더 자세히 풀면서 독자들과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신약 성경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예수님이 어린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어린 아이들은 이등 시민들로 간주되어 무시 당했고 심지어 인구 수를 측정할 때 헤아리지도 않는 것이 유대인 사회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한 어린이를 세우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모델로 칭찬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파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 내러티브를 포함하는 마태복음 18장은 전체가 우리에게 독특한 교훈을 준다. 이야기의 발단은 매우 아이러니컬한 컨텍스트 속에 있다. 마태복음 17장 후반(17:22-23)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곧 당하실 심각한 고난,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깊은 뜻은 생각지 않고 엉뚱하게 다투면서(누가복음 9:46 에는 “변론이 일어났다”라고 되어 있다)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했다. 아마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기의 우월성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테면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나는 바다 위도 걸었어. 나는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변화하시는 것도 보았어. 나는 물고기 입에서 나온 기적적인 돈으로 주님과 함께 성전세를 냈어. 등등” 의 생각으로 자신이 가장 큰 인물이라고 내세웠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 예수님의 어느 담화에서나 처럼, 우리는 그의 심리적 꿰뚫어 봄과 완벽한 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누가 크냐”고 다투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교만이야말로 창조시(창3:5)부터 바울 시대(빌2:1 이하)나 지금까지 인간 타락과 공동체에 갈등과 분쟁을 야기하는 인간 심리의 뿌리에 자리잡는 흉악한 죄악이다. 소교회 목회자로서 목회자들 모임에 갈 때 어딘지 모르게 기가 죽고, 특히 주강사가 성공한 대교회 목회자여서인지, ‘교회의 성장 못함은 비행기가 이륙을 못하고 벌벌 기는 것과 같다’는 얘기를 할 때, 특히 사모들을 동반한 경우 기가 죽은 소교회 목사들은 사모들에게 미안하게 느낄 때가 많다. 반면 대교회 목사들은 자기의 성공 사례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만에 하나 그들의 마음 속에 인간적인 교만기가 섞여 있었다면, 예수님의 오늘 본문 교훈을 깊이 새겨야 했었을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세운 ‘한 어린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모 신문 한국판에 실린 한국의 초호화판 호텔에서 나비 넥타이를 매고, 고급 음식을 차려 놓고 생일 파티를 벌이는 21세기 한국 부잣집 어린이들은 아닐 것이다. 또 흔히 생각하는 어린 아이를 철이 없다거나 어리석다거나 보챈다거나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부정적 의미의 모델로 세운 것은 아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은 티없는 천진난만함 과 어린이 고유의 겸손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우셨다. 하나님 앞에 절대 겸손과 의존은 천국 시민들의 특징적인 성품이다.
셋째, 천국 통치의 질서는 집권자들이 백성들을 마음대로 주관하면서 권세를 부리는 이 세상 질서와 다르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마20:20-28). 천국 시민들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자고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천국의 리더십은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