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교향곡 ‘1917년’

2015-05-14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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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동안, (소련의 작곡가)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으면서 혁명이란 무엇인가, 자유, 민중 등을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사회적 제도와 맞물려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거대한 제도적 톱니바퀴 그리고 이에 맞물린 개인의 톱니바퀴 이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소위 사회다. 그러나 기계와는 다르게,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는 늘 사회와 함께 정비례해 온 것만은 아니다. 사회란 제 아무리 안정된 사회라 해도 서로 역주행하는, 즉 혼란기가 찾아올 때가 있다. 재난이나 전쟁, 톱니바퀴가 멈추는 정체기, 개인과 사회가 서로 어긋나고 부딪쳐 멈춰 버릴 때, 우리는 이 폭풍전야를 ‘혁명의 새벽’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쇼스타코비치는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기차역에서 레닌의 연설을 직접 들었고, 그 장면을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했다한다. 쇼스타코비치가 스탈린의 억압 속에서도 망명하지 않고 소련에 남게 된 것은 아마 그때의 감동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붉은 구호 아래 작곡된 ‘ 10월혁명에 바침’(교향곡 2번), ‘ 혁명’(교향곡 5번), ‘ 레닌그라드’(교향곡 7번), ‘ 1917년’(교향곡 12번) 등의 부제가 붙은 교향곡들은 모두 레닌에 대한 추억, 당시의 감격이 서린 것들이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자유, 민중, 사회를 이끄는 주류세력. 법과 제도는 누가 만들었으며, 누구를 위한 것들이었을까? 법이 없다면 질서도 없을 것이고, 정부와 민중도 없을 것이기에 그것은 모두를 위한 법이요 제도이겠지만, 이 모든 것이 평등하게 적용된 사회란 없었다. 법은 늘 가진 자에 의해 이용당해 왔고, 제도는 늘 권세잡은 자, 즉 정권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어 왔을 뿐이다. 그러기에 인류의 역사는 늘 혁명과 혁명, 바꿔, 바꿔의 연속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프랑스 대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일본의 명치 유신, 한국의 5.16 등. 특히 1917년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가 제도에 역주행했던 인류 최초의 공산 국가의 탄생을 알린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이름하여 10월 혁명 거대한 제도와 개인의 톱니바퀴가 서로 얼키고 부딪치고 할키고 물어뜯는 피의 회오리 바람, 그 서막이었다고나 할까.


소련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인류 역사상 드물게도, 이러한 공산 혁명을 직접적인 체험으로 그린, 가장 독창적인 음악으로 서방세계에서도 절찬받았다. 특히 그의 교향곡들이 가장 압권으로서, 서구 음악들과는 다른 소리를 들려준다. 작곡 수법은 아방가르드 불협화음을 답습, 여기저기서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 관악기의 소음이 그저 행진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나물에 그 반찬, 모든 채식주의가 그렇듯, 담백 신선한 맛이야말로 쇼스타코비치를 듣는 색다른 묘미였으며, 서구 사회는 과묵, 간결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색채, 그 우직한 (혁명)예술에 열광적인 환영을 보냈다. (물론 그것은 진정한 혁명을 염원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에서 나온 지지였는지도 모르지만) 소련은 이러한 쇼스타코비치의 천재를 체제 선전을 위해 100% 활용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초기의 레닌식 공산주의에는 열광했지만 스탈린의 체제에서는 억압받았다. 그러나 곧 스탈린에 복종했고, 사회주의의 이상을 그린 수많은 작품을 통해 피의 숙청을 피해갔다. 그가 추구했던 이념 그리고 스탈린 시대의 작품이 얼마나 일치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로 남아있지만, 초기 작품들의 노트 등을 미루어 (쇼스타코비치가) 예술에 대한 자유, 차별 없는 순혈 공산주의를 열망했던 것만은 분명했던 것 같다. 1961년에 작곡된 교향곡 12번 (일명 1917년)은 ‘ 1905년 혁명’을 그린 11번과 달리, 냉전 시기의 양대 산맥이었던 소련 건국으로 이어진 사회주의 혁명(볼셰비키)을 구체적인 부제와 함께 그려내, 서방 측의 환영을 받지 못했고 이러한 정치적 비판은 소련이 붕괴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쇼스타코비치는 순혈 공산주의자로 평가받기에는 (스탈린의 밑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바로 이점이 쇼스타코비치의 두 얼굴… 공산당의 꼭두각시였는가, 아니면 진정한 혁명 음악가였는가 하는 점을 모호하게 만드는 딜레마로 남아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의 혁명 예술만큼은 오늘도 살아서 (교향곡 1917년 등)듣는 이의 심장을 감동으로 뛰놀게 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자유가 없다면, 제 아무리 의식주가 평등, 풍부하다 해도 그것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공산주의의 실패는 평등의 가치를 다른 모든 가치(자유)보다도 우선시했던 착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끝없는 소유욕, 그 이기심과 욕망에 철퇴를 가하기 위해서라도 공산주의 혁명은 어쩌면 꼭 한번은 거쳐갈 수밖에 없었던, 인류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도 10월의 혁명, 그 대지진의 체험이 있으십니까? 위험한 곡예 그러나 아찔한 스릴의 혁명 교향곡, 1917년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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