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중의 한명인 후랭클린 루스벨트는 소아마비 중증 환자였다. 그래서 늘 두 다리에 보조기를 차고 휠체어에 의지하며 업무를 봤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기의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힘들어도 늘 당당하게 웃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평소와는 정 반대의 행동을 한다. 전쟁부상자들이 입원한 원호병원에 갔을때다. 루스벨트는 각 병실을 방문하면서 경호원에게 윌체어를 아주 천천히 밀라고 요청한다. 그리곤 바지를 들어 올려 보조기를 드러낸다. 물론 자기의 무기력한 다리를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 행동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강력하다.
나치와 일본군의 폭격으로 팔 다리가 짤린 병사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함이다.“나같은 사람도 미국 4선 대통령이 되었는데 여러분들도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다.
지난 주일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자선 컵라면콘서트가 있었다. 이름이 컵라면콘서트인 이유는 컵라면이 콘서트 입장권이기때문이다. 입장권으로 모아진 컵라면과 헌금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전액 전달된다. 이 콘서트에 참석한 음악인들 역시 자신들의 재능을 기부함으로 자선에 참여하셨다.
자선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필요한 물품을 모아서 전달하는 것만을 말할까? 성경에서 말하는 자선(자비)이란 좀더 포괄적이다.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면서 위로와 소망을 주는 모든 행동을 말한다. 그런 차원에서 자선은 긍휼이고 배려고 친절함이다. 루스벨트의 용감한 행동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성경은 자비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다. 이 비유는 한 율법사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 등장한다. 율법사가 예수께 영생 얻는 비결에 대해 묻자 예수께서“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신다. 그러자 율법사가“누가 내 이웃이죠?” 라고 도발한다.“모두가 다 이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이다.
한마디로 “이웃도 나와 격이 맞아야 이웃이죠”라는 의미다. 철저히 이기적 이웃개념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비유를 한개 던지신다:“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법에 능통한 두명의 유대인이 그냥 지나친다.
그런데 무시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갈길을 멈추고 자기 돈을 써가며 그 사람을 치료하고 살려준다.”그러면서 질문하신다.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 되겠는가?” 주님의 질문은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이 없다. 주님의 초점은 내가 상대에게 어떤 이웃이 되는가에 초점을 모은다. 철저히 이타적 이웃개념이다. 비유를 통한 주님의 초점은 간단하다. 이웃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상대를 어떻게 차별없이 대하는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하지만 사람을 차별하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변에 깔려있다. 미국인이 중국인(아시안) 을 칭크, 흑인을 니그로라고 조롱하듯, 우리 역시 “깜둥이”라는 차별적 표현을 포함해 학벌, 외모에 대한 차별적 고정관념이 있지 않는가?
어떤 형태로든 사람을 등급화하거나, 비 인격화 시키는 태도가 있다면 정상적이고 참된 자비가 베풀어지기는 쉽지 않다. 그럴 경우 우리 속에 남는 것은 상대의 신분에만 초점을 모으는 율법사뿐이지 선한사마리아 사람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강도 만나 죽어가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겪으며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에게 어떤 이웃이 되는가이다.
컵라면 콘서트가 우리 주변의 어려움을 겪는 이웃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격려 그리고 소망이 되었다면 성공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행사가 많은 교회와 단체들을 통해 실시됨으로 우리 주변의 어려움을 겪는 이웃이 좀 더 따뜻해지고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