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자 / 6월 은퇴하는 MD 클락스버그 초등교 교장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이광자 교장,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액티비티 활동을 하고 있는 이광자 교장의 모습. 이 교장은“아이들과 헤어지려니 벌써 눈물이 난다”고 말한다., 학교전경.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은퇴를 결정한 이광자 클락스버그 초등학교 교장은 행복이란 짧은 단어로 자신의 교직 외길 41년을 함축했다. 1974년 햇병아리 교사로 출발해 아이들이 걸어갈 미래의 등불을 밝혀온 그는 워싱턴 지역의 첫 한인 교장이란 기록도 남겼다. 또 교직 틈틈이 한인 2세들의 한글교육을 위해서도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 한 눈 팔지 않고 천직의 길을 걸어온 그의 신념의 역정(歷程)을 더듬어 봤다.
41년 교육 외길, 한글교육에도 남다른 애정...“행복했어요”
“아이는 부모의 눈으로 사회 바라봐...무조건 감싸지 마세요”
-6월이면 은퇴다. 평생 걸어온 교직을 떠나는 마음이 착잡할 터인데.
▲벌써 41년이다. 까마득하다. 매일매일 보람 있는 날이었다. 감사한 일이다. 조그만 동양 나라, 아무 것도 모르는 나라에서 온 여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훈련시켜 성공적으로 일하게 해준 미국사회에 감사를 드린다. 지난 시절, 모든 사람들이 내 멘토였다.
-이른 은퇴를 결심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물론 교직에서 은퇴할 법적 나이란 없다. 다만 어느 정도 나이도 됐지만 모두가 서로 아쉬워하고 좋아할 때 떠나는 게 순리하고 생각해 은퇴를 결정했다.
-언제부터 미국 교사의 길을 걷게 됐나?
▲한국외국어대 이태리어과를 마치고 결혼한 다음 해인 1970년 미국에 왔다. 처음엔 유학 수속을 하다 주위에서 너무 고생한다고 만류해 다시 이민수속을 밟아 오게 된 것이다. 한 1-2년 미국생활 적응을 하다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메릴랜드대 등에서 공부를 했다. 당시는 요즘처럼 교사 자격증 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 교직 학과목을 이수하고 교생 실습 6개월을 마치면 교사가 됐다. 1974년 어시스턴트를 거치지 않고 바로 ESOL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몽고메리 카운티 공립학교에서 한인으로는 내가 두 번째 교사다. 나보다 1년 앞서 한분이 계셨다.
-성인이 돼 미국에 온 1세인데 영어 능력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았나?
▲물론 영어가 딸리니 ESOL 교사로 시작한 거다. 다행히 언어에 취미가 있어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발음이 좋아 아이들이 놀리고 하는 일은 없었다.
요즘은 액센트가 있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사회도 다인종화에 국제화되면서 그에 따른 변화상이다. 교실에 들어가 보면 도시락에 밥과 국수 싸오는 아이들도 많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학교 음식도 국제화 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미국의 포용성은 장점이다.
-1970년대 중반은 한국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오던 시기인데 에피소드도 많을 듯하다.
▲한인 이민자들이 늘면서 ESOL 교사 외에 ‘부업’도 많이 했다. 학교가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한인 부모가 평소처럼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일을 하러 간 것이다. 아이도 부모도 영어가 서툴러 그날 학교가 문을 닫는 걸 몰랐던 거였다. 하루는 오전수업만 하는 해프(Half) 데이인데 한인 부모가 아이를 데리러 오질 않았다. 아이는 집에도 못가고 발을 동동 구르고….
영어 때문에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생기자 그걸 모두 내가 맡게 된 것이다.
-학부모 담당관도 지냈다고 들었다. 어떤 일을 한 것인가?
▲ESOL 교사로 5-6년 일할 무렵이다. 학교와 학부모 간의 대화단절 사태가 많이 발생하자 학교에서는 아예 학부모 담당관이란 보직을 만들어 맡으라 했다. 그때 처음 학부모 담당관이란 보직이 생긴 거다. 4-5년을 학교와 학부모의 가교 역할을 했는데 84년쯤 몽고메리 카운티 교육감이 마이너리티 교사 선발 전담반을 구성했다. 한인 등 이민자 학생들이 많아진데 따른 대책의 일환이었다. 여기에 선발돼 9년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소수계 교사를 선발을 위해 미 전국을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
-소수계 학생들을 위한 교육계의 배려가 인상적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미국의 정신을 엿보게 한다.
▲한번은 몽고메리 카운티 교육감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날 교육청의 주요 인사들이 다 몰려와 놀랐다. 알고 보니 교육감이 전 스탭들에게 모든 약속을 취소시키고 내 강의를 들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한식 뷔페와 한국문화를 소개했다. 외국계 학생들이 많아지니 외국의 문화와 역사를 자기들이 먼저 배우려고 하는 그 열의에 정말 놀랐다.
-클락스버그 초등학교 교장은 언제부터 맡게 됐나?
▲1989년 교감 시험에 응모했다. 메릴랜드 주 전체서 10명이 신청했는데 호텔서 이틀간 먹이고 재우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테스트하는 심사관도 10명이나 됐다. 레스닉(Resnik) 초등학교 교감에 부임해 1년 후 웨소토네(Whetsotone) 초등 교감으로 전근 갔다.
그 후 교장 인턴 1년을 거쳐 1997년 클락스버그 초등학교 교장이 된 거다.
-클락스버그란 어떤 동네인가?
▲메릴랜드 270번 도로상의 저먼타운을 지나 프레드릭 못 미처 있다. 리틀 베넷 골프장 근처다. 당시엔 옥수수 밭이 늘려 있는 미국의 전형적인 시골학교였다. 89%가 백인이다. KKK가 나올 정도로 백인 동네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도시 교외지역으로 변모했다. 학교에 중국계가 2명, 월남계 2명에 한인 학생은 입양아 3명이 있었다. 아시안 학생이 드물었다. 지금은 아시안 학생 수가 더 많아졌다.
-교장은 어떤 역할을 하나?
▲한국과 달리 사무실 지키는 자리가 아니다. ‘교육 리더(Instruction Leader)’가 교장의 역할이다. 한 주에 최소 3-4일 교실을 방문해 교육환경을 살피고 주 2회 교사 트레이닝을 실시하고, 하수관 터진 것부터 학교 내 자잘한 데까지 손 안 가는 곳이 없다. 큰 집안 살림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한인 학부모들이 문화 차이에서 겪는 오해나 실수는 없나?
▲문화의 차이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선생님으로서 당연한 행동이 자칫 멸시나 차별로 오해해 받아들이는 한인 부모님들을 가끔 본다. 자녀를 무조건 감싸면 안 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눈으로 사회와 미국을 본다.
-대다수 한인 부모들이 미국 교육에 대해 잘 모른다. 그로 인해 자녀 양육에서 시행착오를 하는 점도 있지 않나?
▲미국의 교육방식은 한국과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는 먼저 학생 스스로가 선택하게 한다. 자기가 원하는 걸 분명히 표현하게끔 학습하게 한다. 근데 한인 학생들은 선생님이 선택을 원하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위계와 권위, 지시에 익숙한 문화에서 자란 탓이다.
또 사고력을 기르는 교육을 중시한다. 수학에서도 1+4는 5란 답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 5가 되는지를 설명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고 아이들이 창의력을 가질 수 있게 지도한다.
그러니 집에서 부모님들이 수학을 안다고 절대로 가르치지 않았으면 한다. 한국과 가르치는 방식이 너무 다르다.
1-3학년 한인 아이들이 책을 술술 잘 읽는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학교에서는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고 아이들이 발표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킨다.
5-6년 전부터 미국의 교육에 사고력 배양을 중시하는 변화가 오고 커리큘럼도 바뀌면서 구세대 선생님들도 여름방학이면 주 2-3회씩 훈련을 받는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고민이 크다. 팁을 좀 달라?
▲사실 부모님의 역할이 크게 필요 없다. 학교서 하라는 것만 잘 하면 성공한다. 다만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한다. 아이들이 과제물을 갖고 왔는데 모르겠으면 선생님에 이메일을 보내면 된다.
요즘은 학교 웹 사이트 뉴스 레터에 무엇을 가르치는지 모두 설명을 해놓는다. 아이들과 그걸 보면서 상의하면 좋겠다. 아이들은 부모님들과 시간을 같이 보내고 관심이 있다는 걸 알면 좋아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잘못한 점이 있어도 꾸중보다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를 아이와 대화를 나누길 권하고 싶다.
-한미교육재단 이사장으로 2세들의 한글 및 정체성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고 또 클락스버그 초등학교에 방과 후 한국어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사물놀이, 태권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한국문화 전파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 프로그램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나?
▲한미교육재단은 이제 세대교체가 필요할 때다. 이사장을 맡으실 적절한 분이 계시면 좋겠다. 하지만 2세 교육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계속 될 것이다. 내가 몸담은 학교에서의 한국 문화 프로그램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계속 진행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학교에만 매달려 41년을 보냈다. 그동안 하지 못한 걸 하고 싶다. 노경(老境)에 접어들며 여행도 다니고, 스패니쉬도 배우고, 쉬기도 하고, 건강도 챙기고…. 그런데 아이들의 눈망울이 자꾸 밟힌다. 아이들과 헤어지려니 벌써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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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