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 칼럼] 김 숭 목사 ㅣ 볼티모어를 회고하며...

2015-05-06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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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는 이민 온 지 5년 뒤인 1995년 여름부터 97년 여름까지 2년 간 산 곳이다. 그곳은 신학생이자 파트타임 사역자가 갖는 여러 가지 한계의 껍질들을 벗고 처음으로 풀타임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나의 ‘정식’ 이민자 생활을 시작케 해준 정말 고마운 곳이다. 비록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난 거기서 한 한인교회 부목사로 지내며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좋은 추억들을 만들었다. 볼티모어는 이처럼 내 이민역사에서 소중한 한 장(chapter)을 차지하는 도시이다.

그런데 그 곳을 떠난 지 18년이 지난 지금 내 귀엔 그 도시와 관련해 썩 좋지 않은 뉴스들이 들려오고 있다. 한 흑인 청년의 죽음을 계기로 온 도시가 약탈과 방화와 폭동 속에 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내 눈에 더 낯익게 들어오는 건, TV 화면 속 폭동 현장 배후에 잡힌 볼티모어 슬럼가의 전경이다. 볼티모어로 이사 가기 전 필라델피아에서 살았다.

볼티모어는 필라델피아와 불과 두 시간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다. 둘 다 오래된 도시이다. 하지만 도시의 풍경은 서로 달랐다. 볼티모어는 유난히 빨간 벽돌 건물들이 많았다. 그리고 아주 넓은 슬럼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거의 폐허 수준의 집들에, 온갖 쓰레기에, 낙서로 심하게 훼손된 벽들, 그리고 대낮인데도 길거리에 쉽게 발견되는 청장년들(그 시간에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어야 할), 아무튼 볼티모어의 첫 인상은 이랬다.

부임한 교회엔 블루칼라 교인들이 많았다. 넓은 슬럼지역 거리들의 각 코너마다 닭튀김 집, 리커 스토어, 아니면 작은 동네 슈퍼들이 있다. 그 가게들 오너의 대부분이 한국인들이다. 그리고 그 교회 교인들 역시 대부분 그 업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니 상상해보라.

그들의 매일의 삶 자체가 하나의 전투와 같다.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 총 차고 장사하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들의 이민사 중, 칼이나 총으로 위협 받았거나, 또 실제 사고를 당했던 훈장(?) 한두 개쯤은 다 있다. 구역예배 간증의 소재가 주로 이런 것들이다.

그래선지, 그들의 신앙생활도 죽기살기로 한다. 온종일 위험 속에 있다가 교회 오면 안식을 얻는다. 그들의 눈은 항상 충혈되어 있다. 교회 예배는 그들의 우는 자리이다. 그래서 거기에서 목회를 성공한 분들은 그들의 그런 아픔을 잘 싸매고 보듬어주는 분들이다.

그런 데에 있다가 서부(특히 북가주)에 오니 이곳은 별천지였다. 이민자들의 특징은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고생한 사람인 걸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서부에 와 만난 이들도 이 면에선 예외가 없었는데, 이는 볼티모어에서 온 나로선 이해가 잘 안 되었다.

서부의 이민자 생활은 내 눈엔 정말 천국의 현장 같았다. 날씨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다들 밝다. 그런데도 그들은 힘들다고 말한다. 글쎄, 볼티모어 이민자와의 비교의 경험 때문이겠으나 나로선 동의하기 힘들었다.

내 생각인데, 이곳의 교민들은 어쨌든 더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과거의 LA 폭동과 비슷하게, 이번 볼티모어 폭동의 애꿎은 희생자들 역시 대부분 한인들이다. 그때 그 교인들은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한 판국인데 폭동까지 발생했으니, 그들의 우환의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 가격이 이루어졌을지 쉽게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이와 관련해 목회자의 솔직한 시각 하나를 피력하고 싶다. 목회자의 시각에서 볼 때 이쪽 서부 교인들의 신앙생활에는 좀 문제가 있다. 동부의 그들은 열악한 삶의 환경 때문인지 신앙생활도 치열하게 한다. 그들의 치열한 삶이 그들의 치열한 신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면 여기는 그런 치열성이 많이 부족하다. 신앙생활도 캘리포니아 션샤인 같이 하는 것 같이 보인다. 밝고 명랑한 건 물론 좋은 거다. 하지만 중후한 신앙적 주제마저도 가볍게 취급한다든지, 주일예배가 삶의 옵션이 된다든지, 또는 신앙생활을 ‘개인적 교양’의 일부로 여기는 건 성경적 신앙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난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신앙의 중심기둥으로서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치열함을 요구한다. 볼티모어의 고난 받는 동족 신앙인들을 통해, 서부 좋은 곳에 사는 내 자신의 신앙적 자아상 건설에 새로운 도전을 가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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