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다른 연구관심, 90편 이상 논문 발표, 200회이상 초청강연
▶ ‘어떤 환자든 빠른시간내 상태 파악’응급의학의 매력
한국의 의료기술은 심장질환 및 장기이식 수술분야에서 세계 최상의 수준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응급의학 수준은 매우 열악하다. 그래서 2012년부터 한국정부는 응급진료 체계 선진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 1,5세로서 오랫동안 한미 양국의 응급의학 분야 교류의 교량역할에 충실하며 한국 응급의료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전문의가 있다. 주인공은 바로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의대 응급의학과 이종서(47) 교수다.
생명을 구하는 의사를 꿈꾸다
그는 1968년 서울 성북구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부모를 따라 LA로 이민 왔다. 주말마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지를 묻곤 했다. 희망을 갖고 노력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그 때부터 그는 막연히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그는 고등학교까지 힘들지 않게 공부할 수 있었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희망을 따라 노력하면 꿈은 이뤄진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학교생활을 한 것이다.
그는 UCLA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처음 접하는 용어와 원리 때문이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교수를 찾아다녔다. 모르는 것은 교수에게 수차례 반복적인 질문을 통해 풀어나갔다. 그러자 교수도 그를 기억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열성과 적극적인 태도에 교수도 감동을 받았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그가 의사되기를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대학생 때. 응급실 자원봉사를 하면서 한 중국의사가 심폐소생술로 죽음의 문턱에 선 환자를 살리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 때 그는 참으로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꼭 환자를 살려내는 의사가 돼야겠다며 어린 시절 꿈을 굳히게 됐다. 그리고 시카고대학원 의대에 입학해 자신의 꿈인 의사로서의 도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연구에 관심 많은 교수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정형외과와 응급의학을 고민하다 응급의학을 선택했다. 가장 큰 이유는 소위 감기부터 거의 모든 질환과 사고 등에 대한 학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기 위해 NYU 메디컬 센터에 지원했다. 머뭇거리지 않았다. 적극적이고 도전적으로 응했다. 꿈을 크게 가졌다. 스스로의 기회를 만들어 가는 도전적인 인생을 살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전진했다. 그에게는 항상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은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는 성경말씀에 대한 튼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96년 뉴욕에 입성해 NYU 메디컬센터와 벨뷰병원에서 4년 동안 응급의학 분야에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았다. 2000년도에는 한인 밀집지역인 플러싱병원의 부과장으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한인 노인들을 비롯한 환자들에게 의학적 자원봉사를 하면서 응급의학 연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4년 동안 20여 편 이상의 SCI(Science Citation Index)급 논문을 발표하게 된 이유다. 그 후 2004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의대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임상진료를 하면서 학생도 가르치고 연구도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11여 년 동안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 의대 응급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70%는 임상진료를, 30%는 교육과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그동안 90편 이상의 SCI급 논문도 발표했다. 200회 이상의 초청 강연에도 나섰다. 남아메리카, 아시아 및 유럽 등 의 응급의료 시스템 개발 및 강의 그리고 관련 연구와 책 편찬 등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그는 어떤 종류의 환자가 오더라도 정보가 전혀 없는 제로에서 시작하여 빠른 시간 내에 환자의 상태와 진단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응급의학과의 매력이라고 꼽는다. 환자를 진료하면서 환자의 가슴이 과도한 전기 쇼크로 인해 피부가 그을렸을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 환자는 50대 남성으로 심근경색환자였고 심실세동이라는 악성부정맥이 발생해 무려 18번의 제세동 끝에 살아서 퇴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살아서 내원한 환자가 질환의 진행이 치료보다 빠르게 진행돼 사망할 때는 가장 안타깝다고 귀띔한다.
한미 응급의학 분야 교량 역할
그는 1998년 뉴욕대학 수련의 시절 하와이에서 열린 미일 양국의 응급의학 컨퍼런스에서 참가한 적이 있다. 그 때 양국 의사들이 응급의학을 놓고 열띤 토론을 펼치는 것을 보면서 한국과 미국의 응급의학 교류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런 행사야 말로 한국의 응급의학 분야 발전의 지름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 때부터 한국의 응급의학 분야 선진화를 향한 자신의 역할을 찾아 나섰다.
그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스토니브룩대학 의대에 300명가량의 한국내 교수진, 레지던트와 학생들의 방문과 연수를 진행하고 있고 연구도 공유하고 있다. 연구실에만 있어야 하는 한국 교수들이 직접 환자도 볼 수 있는 환경도 마련했다. 미국 의학회내에서 한국응급의학을 소개하는 자리에는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다.
선진 응급의료 시스템 개발과 선한사마리안 법과 같은 유용한 법률이 한국 내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많은 정보 및 지식의 전달자 역할도 꾸준히 하고 있다. 또한 한국 내 응급의학 및 응급구조 학회 등에 미국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자리와 유명한 석학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마련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현재 응급의료시스템, 초음파, 외상들의 세부학회 등을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
미응급의학회, 환태평양응급학회 등 국제학회를 한국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교량역할을 해오고 있다. 많은 한국 국가기관 및 학회 등을 미국내 병원 및 학회와 MOU을 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제주도에 ‘한라스토니브룩 응급의료교육원’을 설립하는 등 한국 의학계 발전에 지속적으로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런 활동은 지난 2008년에 미 응급의학학회(AAEM) 12명의 이사 가운데 유일한 한인이사로 참여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NYU 전공의 시절 당시 담당 과장이 추천을 해줬다. 7000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AAEM의 한인 이사로서 한국과 미국이 중심이 된 응급의학 학술대회의 개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년이 지난 2010년에야 이사가 만장일치로 한미양국 응급의학 학술대회 개최를 결정했다, 그의 끊임없는 필요성 제기와 노력으로 진심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2012년 대한응급의학학회와 제휴해 ‘환태평양 응급의학회’를 창설하고 초대학술 위원장을 맡았다. 같은 해 미 응급의학회와 공동으로 서울에서 전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응급의대 의료진 1,8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환태평양 응급학회 학술대회’를 열었다. 2014년 대전에서 열린 제2회 학술대회 역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성황리에 마쳤다.
한미 양국의 학술대회 개최를 꿈꾸던 그의 꿈은 그렇게 물꼬를 튼 후 앞으로도 격년마다 지속적으로 열리게 된다. 그는 학술대회를 통해 한미 양국의 응급의학계가 도약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한미 양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응급의학계 의료진들과 함께 경험을 나누며 한층 높은 응급의료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멈추지 말라.
그는 매년 초등학생을 비롯해 중, 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폐소생술 시범교육을 한다.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한인 학생들에게 시험 특강도 한다. 후배의사 양성을 위한 봉사다. 그들에게는 의사가 되면 꼭 후배 양성에 적극 나설 것을 당부한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를 낭비하지 말고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결코 물러서거나 멈추지 말 것을 이야기 해준다.
그도 멈추지 않고 적극적이며 도전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임상진료, 강의, 학술연구, 논문집필 등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는 앞으로는 한인들과 함께 의대를 만들어 다음 세대의 능력 있는 인재들을 많이 의사로 진출 시키고 또한 한인들이 보다 나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병원도 설립하고 싶은 꿈을 꾸며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서고 있다. 쉽지 않지만 멈추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다.
그는 인생은 끝없는 도전이기에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사는 것만큼 행복한 삶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겐 일을 할 때의 즐거움이 바로 행복인 것이다.
<연창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