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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네티컷/ 칼럼: 존중하는 삶, 이해되는 삶

2015-04-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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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네티컷/ 칼럼: 존중하는 삶, 이해되는 삶

이지형 <코네티컷한인교회 교육목사>

이지형 <코네티컷한인교회 교육목사>

2014년 마케도니아 대통령 조르게 이바노프가 뉴헤이븐에 방문해 “마케도니아의 공존 모델 ”이라는 연설을 한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종교에 대한 공공정책이 과거에는 “동화를 지향하는 통합(integration with assimilation)”이었으나 현재는 “동화를 지양하는 통합(integration without assimilation)”이 되었고, 과거에는 “다양성 속의 관용 (tolerance in diversity)”이었는데 현재는 “다양성 속의 존중 (respect in diversity)”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이바노프 대통령은 각 종교의 다양성은 서로 동화됨 없이 그리고 관용의 미덕을 넘어 보존되어야 하며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정책 덕분에 종교분쟁과 인종분쟁이 많았던 마케도니아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평화상태가 이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연설 가운데 대통령이 강조했던 “동화 없는 존중(respect without assimilation)” 정책은 한 순간에 생겨난 것이 아닌 오랜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재미있는 것은 나의 자녀의 유치원 벽면에도 비슷한 글귀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이해는 존중에서 시작된다 (Understanding begins with respect).” 혹자는 이해를 통해 존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과연 상대방을 얼마만큼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동시에 던져야 한다. 다른 세상을 다르게 살아 온 상대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의 삶과 경험 그리고 생각을 존중한다는 전제 하에 대화를 시작하면 이해에 배움이라는 덕이 부가된다. 그래서 설령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다가 아니라 배움이라는 측면에서 상대의 다른 세계를 배움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존중하지 않는다면 시작부터 대화는 막히게 된다. 오직 자신이 경험한 세계 안에서만 살기 때문이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 밖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존중인 것이다. 이런 존중의 마음을 전제로 상대방과 대화한다면 더 많은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더 깊은 신뢰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는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과 생각에 반드시 100% 동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도 서로 어긋남 없이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존중은 바로 상대방의 다양한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호 존중은 서로 간의 분명한 정체성을 평화적 공존 안에서 오히려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바노프 대통령의 “동화 없는 존중”은 미국의 다문화 다인종 사회 가운데 살아가는 한인들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한인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바로 하나로 동화될 수 있지만, 가만히 보면 미국 안에서 한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함의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된다.

한국에서 바로 온 사람, 미국에서 오래 산 사람,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다른 나라에서도 살다 온 사람. 같은 한인이라고 해도 그동안 살아 온 삶의 궤적이 너무나 다양하다. 이것을 어떻게 다 이해한 후 존중할 수 있을까?

같은 경험을 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화 없는 존중” 원칙은 우리 한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문화적 편견이나 고정관념 혹은 지식이나 경험들을 내려놓고 다른 삶의 길을 걸어 온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떨까.

그것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보다 말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삶의 역동성 가운데 어떻게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었는지 존중 가운데 서로 귀를 기울인다면 이해라는 선물이 우리 앞에 놓여 질 것이다.

그 이해는 값진 보물이리라. 그리고 한인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역동성과 융합성 그리고 정체성을 더욱 부요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존중하는 삶, 이해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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