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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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초대/ 은퇴하는 팔순 닥터 정낙진

2015-03-2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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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년간 정들었던 환자들과 이별하려니 섭섭아네요”

▶ “뉴저지 딸 병원 근처로 이사, 좋아하는 골프치며 소일할 것”

플러싱에 가면 38년간 늘 한 자리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을 내리는 한 내과· 가정의가 있다. 닥터 정낙진은 오는 31일로 한인환자와 함께 한 38년을 마감하고 은퇴한다. 그의 봉사의 삶을 듣는다.

▲38년 대장정을 마감하다
“환자들을 보면 참으로 반갑다. 친해지면 친형제와 같다. 한 번도 환자가 싫다는 적이 없었다. 포트워싱턴 집과 병원까지 45분 거리를 매일 왕복하며 오랜 세월을 지냈다. 개인 오피스, 뉴욕퀸즈하스피탈, 플러싱 병원, 교회 모두 플러싱에 있다 보니 7일내내 이곳에서 생활을 한 셈이다. 사실 내 나이가 85세인데 은퇴가 늦은 것이다. 짐을 정리하자니 섭섭하다. 그래도 나이가 나이니만큼 은퇴한다. ”

77년에 플러싱 바우니스트릿에 작은 건물을 구입하여 ‘정 내과’를 개업할 때 플러싱 인구는 5만명 정도, 한인의사는 10여명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인구 30여만 명에 한인의사는 100명이상으로 추산된다. 현재의 병원 자리는 대만계 중국인 치과의가 렌트 들어올 것이라고 한다.


“한인의사가 늘고 전문 분야도 다양해지니 한인들에게는 축복이다. 한국말로 친절하게 진찰 받고 치료도 마음 편하게 받을 수 있다. 한인의사들의 단체인 뉴욕한인개업의협회는 1년에 20명 장학생을 선정하고 보험 없는 한인 대상 무료진료 행사도 열면서 한인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영어가 서툴고 미국 생활도 낯선 한인들에게 ‘인자한 의사 선생님’으로 통하던 그에게는 30년 이상 된 환자들이 많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긴 인생에 아무 것도 아니다. 병원에 들어서면서 피를 토한 환자가 있어 바로 입원을 시키고 보니 암이었다. 외과의사가 수술 하고 꾸준히 치료도 했으나 3년후 사망했다. 유족들이 내과의, 외과의, 병원 모두 걸어 소송 한 적이 있었다. 원래 환자의 병이 깊었기에 패소했다. ”

▲상 받는 것보다 협회 일이 중요
“뉴욕한인개업의협회는 지난 30년간 1년에 1~2번 골프대회를 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나간다, 내가 안가면 안 된다는 믿음이다. 한번은 암협회에서 표창장을 준다고 했는데 그날 골프시합이 있어서 못 간다고 한 적도 있다.”

그는 이렇게 애정을 쏟는 개업의협회 원로 선배로써 평생 협회의 자문위원이다.
지난 2000년대초, 3년간 뉴욕하스피탈이 주관한 퀸즈지역 의사봉사단체 헬스리치 뉴욕이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의료 서비스를 실시한 적이 있다.

정낙진을 비롯, 임병우, 오정환, 설흥수 등 한인의사 4명을 포함한 90명 이상의 의사들이 한인을 비롯 중국계, 히스패닉 등 타인종 환자 수백 명을 대상으로 폭넓은 의료혜택을 제공했었다.

▲학병 지원하다
정낙진은 1930년 경북 영천군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8살까지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 동네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갔고 매일 10리길을 걸어서 통학 했다. 대구 중학 3학년 때 8.15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나기 전까지 시대가 상당히 혼란했다. 좌익, 우익, 팔공산 공비, 지리상 공비 등등 수많은 갈래로 나눠 싸웠다.” 그는 학생의 본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대구의과대학 1학년이 된지 불과 두 달, 6.25가 터졌다.
“학생 300명이 중앙 강당에 모여 조국수호궐기대회를 열었다. 그 중 33명이 혈서로 맹세하며 학병 지원을 했다. ”


청년 정낙진은 새끼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 마음을 간직한 채 제일훈련소에 배치되었다. 9월초 칠곡군 가성에서 대구비행장을 점령하려는 인민군을 상대로 미8군과 그가 참여한 대대가 연합하여 10일간 맹렬하게 싸웠다.

그때 그는 산중턱에서 총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미군을 업고 200미터 산길을 내려가 육군 병원으로 이송시켰다. 부상병을 맞이한 병원의 미군은 “고맙다, 너는 철모가 없으니 이것을 쓰라”고 자신의 철모를 벗어준 일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학업에 복귀한 정낙진은 의과대학 졸업 후 폐결핵 치료 전문의 교육을 받고자 미국으로 떠난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2년간 공부한 후 보건학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결핵퇴치에 큰 공헌
그후 15년간 정낙진은 경상북도 결핵관리 담당의, 보건사회부 산하 처음으로 결핵과 신설 등 한국 결핵사의 총지휘자가 되어 맹활약한다.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결핵 퇴치가 포함되면서 그는 WHO(세계보건기구), 유니세프, 결핵협회가 서로 협조하여 전국 보건소를 통한 100만명 결핵환자 치료에 힘쓴다.

“미국 평화봉사단이 1차 50명, 2차 50명 한국으로 왔는데 모두 결핵관리사업을 위해 보건소로 파견되었다. 환자를 보호 치료한 결과 100만 명이던 환자가 20만명으로 줄어드는 성과를 보았다.”

정낙진은 페결핵 퇴치에 힘쓰며 WHO의 인정을 받았고 1972년 1년간 하와이 대학에서 역학을 공부했고 이어 사모아 WHO에서 근무하며 결핵환자를 관리하고 치료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한국의 70년대는 정세가 불안했다. WHO 고문관으로 5~6년간 사모아 지역에서 근무했는데 아무래도 가족과 같이 있어야겠다 싶어서 74년도에 아이 셋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왔다. 미국은 자유와 평화, 부가 넘치는 나라로 무한한 가능성이 보였다.”

▲나이 43세에 인턴
막상 미국에 왔지만 정낙진은 기초, 예방의학 전문의였기에 미국에서 개업하려니 나이 43세에 임상의학을 시작하는 인턴부터 해야 했다. 2년간 뉴저지 뉴브론스윅 병원, 1년간 롱아일랜드 주이시병원에서 근무한 후 드디어 77년 ‘정 내과’ 개업을 하게 된 것이다.

부인 배영자와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장남 크리스 정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위장내과의, 큰 딸 그레이스 정은 피부과, 막내딸 린다 정은 의사인 남편을 내조하고 있고 사위 둘이 모두 의사, 손녀도 의사이다 보니 집안에 의사가 7명이다. 집안 가족이 피부과, 위장내과, 정형외과, 정신과, 신경의학과, 내과의 등으로 종합병원을 차려도 될 정도다.

뉴저지에서 개업한 큰딸은 ‘정 트리오’ 어머니인 고 이원숙 여사로부터 200만 달러 유산을 물려받아 침구·통증치료 동서의학연구소를 차리기도 했다. 큰사위가 이여사의 막내아들인 정명규 전문의다.
“아이 셋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 와서 손녀 둘이 결혼했고 지금은 직계가족이 16명이다. 우리 부부 모두 열심히 교회를 나갔고 아이들도 모두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잘 하고 있다.”

그의 아내 배영자는 대구 경북고녀와 효성여대를 나와 한국에서부터 YWCA 활동을 해왔는데 퀸즈 YWCA(전 플러싱 YWCA)회장,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뉴욕지회장을 지낼 정도로 커뮤니티 봉사활동을 활발히 해왔다. 정낙진, 배영자 부부가 퀸즈 YWCA 만찬위원장을 맡는 등 확실한 외조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내 인생의 세 가지
“포트 워싱턴 샌포드의 집을 팔고 뉴저지에 있는 딸 병원 가까이로 이사 가려 한다. 은퇴하면 골프를 더욱 칠 것이다. 집에서 5분 거리에 골프장이 있다. 내가 좋아하니 아들, 사위, 손자 모두 골프를 좋아하고 소질도 있다.”

그의 피를 물려받은 친손자 데이빗 정(25, 캘리포니아 플러톤)은 골프신동으로 스탠포드 대학을 나와 현재 프로 골퍼로 라틴아메리카 투어 중이다. 내년에 미국 PGA 진출을 앞두고 있다.

“인생을 돌아보면 첫째 6.25때 목숨 걸고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싸웠고 둘째 한국의 결핵퇴치를 위해 15년간 열심히 일했고 셋째 미국에 와서 한인들의 건강을 위한 의료에 애쓴 점, 이렇게 내 삶은 정리된다”

머리도 눈썹도 새하얀 신령 같은 정낙진, 그의 삶은 허투루 산 적 없이 뚜렷한 족적이 보이기에 은퇴를 맞는 심정도 담담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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