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르포/ 봄의 길목에서 만난 히스패닉 일용직 노동자들
▶ 팰팍 브로드애비뉴 일대 노동자들 한숨
팰팍 브로드 애비뉴에서 일일직장을 찾는 남성들의 모습.
햇살이 가득한 봄날이 되기엔 바람이 다소 찼던 23일 아침. 한인 상가가 몰려있는 뉴저지 팰리세이즈팍 브로드애비뉴 도로변 곳곳은 평소보다 많은 히스패닉 남성들로 북적였다.
봄이 코 앞으로 다가오면서 거리를 활보하는 한인들의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는 것과 달리 이들은 아직도 하나같이 두툼한 겨울외투 그대로였다. 두 손은 바지춤에 쑤셔 넣은 채, 시시각각 방향을 바꾸는 바람을 등지느라 계속 몸을 돌려댔다. 4월을 일주일 남긴 시점이지만 이들에게 봄은 아직 먼 이야기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브로드애비뉴는 이처럼 ‘일용직’을 찾기 위해 도로변을 서성이는 히스패닉 노동자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됐다. 이들은 한글간판이 줄지어 있는 인도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다가 차가 한 대 멈춰서면 쏜살같이 달려가 ‘일당’을 흥정한다.
물론 일부 한인들은 한인타운에 모여든 이 같은 이방인의 모습을 보며 그 앞을 지나가기를 꺼리기도 하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
그러나 막상 이들에게 브로드애비뉴는 하루 하루 생계를 잇기 위한 절박한 구직 시장이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보낼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당장 며칠 치 끼니 마련을 위해 이곳에 멈춰서는 차들에 눈을 떼지 못하는 청년들도 있다.
이날 오전 10시 무렵 팰팍 캡우동 가게 앞에서 만난 과테말라 출신 G모(40)씨는 “오늘도 또 허탕 친 것 같다. 벌써 닷새째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며 푸념 섞인 말을 늘어놨다.
G씨에 따르면 일거리가 적은 겨울에는 대부분 한 달에 300달러를 벌기도 힘들다. 지난달은 고작 3일 만을 일했을 뿐이다. 다만 5명이 방 하나를 함께 쓰고 있기 때문에 당장 길거리로 내몰릴 일은 없지만 끼니를 챙기는 게 어렵다고 고백했다.
G씨가 가장 선호하는 일일 직장은 ‘공사판’. 아무래도 봄이 되면 공사를 시작하는 주택도 많고, 오래된 건물을 해체하는 일도 많이 있다. 이런 일을 만나면 시간당 15달러를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더디게 오는 올 봄이 G씨에겐 더욱 더 야속하기만 느껴진다.
길 건너편에 서 있던 J씨는 영어가 서툴렀지만 기자의 질문 하나하나에 애를 써서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무뚝뚝하고, 다소 험상궂은 인상과는 달리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정이 많은 평범한 히스패닉 아저씨였다.
역시 과테말라 출신인 J씨는 부인과 딸을 남겨두고 홀로 미국으로 건너왔다. 예전에는 일거리가 적은 겨울엔 과테말라로 돌아갔다가, 여름에 미국으로 오곤 했는데 이번 겨울은 그냥 남아있었다. 말은 안했지만 체류신분 문제인 듯 했다. J씨는 “눈 많은 겨울이 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이러다간 이번 달에도 고향집에 돈 보내긴 틀렸다. 큰 일이다”라면서 절박한 심정을 드러냈다.
이날 브로드 애비뉴에서 만난 히스패닉 노동자 상당수는 과테말라 출신. 멕시코나 기타 국가 출신들은 한식당이나 미용실 등에 미리 자리를 잡고, 같은 민족의 인력을 그 업종으로 끌어들이는 문화가 형성돼 있지만, 과테말라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런 이유때문 일까. 이들은 기자에게 한결같이 하루빨리 일용직 생활을 청산하고 번듯한 업체에서 ‘풀타임’ 직원으로 일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취재를 하던 중 갑자기 구급차 한 대가 이들 남성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을 했다. 과테말라 출신의 한 남성이 폭음으로 쓰러진 게 그 이유였다. 일거리가 없다 보니 술을 과하게 마시게 됐고, 결국 의식까지 잃었다는 게 주변 동료들의 설명이었다. 이때가 불과 오전 11시. 이들의 세상은 아직 겨울 한복판이었다. <함지하 기자> A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