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 70주년 기념 결의안 표결 없이 통과
▶ 6자회담 당사국 공동발의, 무력사용 반대 입장 재확인
북한 외무상이 1950년 7월2일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케이블 전보. 러시아어로 작성된 이 케이블은 바로 다음날인 3일 유엔 안보리 공식 문건(S/1554)으로 회람됐다. 북한은 전보에서 6.25 전쟁에 대해 "미국의 허수아비인 남조선이 무력도발을 일으켜 국가 방어 차원에서 대응했다"며 "남조선 해방 전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38선 표석. 강원 인제군 남면. <사진=한국브리태니커회사>
<유엔본부=신용일 기자> 유엔총회는 지난 달 26일 러시아가 제출한 ‘세계 2차 대전 종결 및 유엔 창설 70주년 기념’ 결의안(A/69/L.52.Add.1)을 표결 없이 통과시켰다.
총 193개 회원국이 제각기 표를 행사는 국제무대인 유엔이 특정 결의안에 이처럼 ‘컨센서스’(consensus)를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이날 채택된 유엔 결의(A/Res/69/267)는 회원국들이 당시 전쟁으로 사망한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유엔이라는 국제연합기구(1945년 출범 당시 51개국)의 정신을 다시 되새기는 내용으로 그 어느 국가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결의에 따라 총회의장은 오는 5월 2째 주에 뉴욕 유엔본부에서 특별회의를 개최해 희생자들을 기리고 무력분쟁의 끔찍함을 조명하게 된다.
지난 해 9월 개회된 제69차 유엔총회가 지금까지 여러 결의안을 채택했으나 이번 총회 결정을 따로 언급하는 이유는 한반도 평화와 안보를 위해 구성된 ‘6자회담’(한국, 미국,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당사국 모두가 결의안 공동발의 국가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총회 결의는 이들 6개국을 비롯한 유엔 회원국들이 한반도에서의 과거 무력분쟁(1950년 6월25일)과 앞으로의 그 어떠한 무력사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다시 또 확인한 셈이다. 특히 한국인(남·북)들에게는 올해가 ‘세계 2차 대전 종결 및 유엔 창설 70주년’ 이외에도 별도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해방 70주년이다.
그런데 이에 한 발 더 나가서 일각에서는 올해를 분단 70주년이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말 부임한 안명훈 주유엔 북한대표부 차석 대사는 1월 유엔본부에서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겨냥해 “미국의 반 공화국(북한) 적대정책”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올해를 분단 70주년이라고 강조했다.
또 지난주에는 유엔특파원협회(UNCA) 주최 간담회에서 평양 - DMZ(남북비무장지대) - 서울 횡단보도 계획을 발표한 미국과 한국의 “여성평화운동가들”이 올해를 분단 70주년이라며 행사의 의미를 내세웠다.
뉴욕 유엔본부 도서관은 ‘한국문제’(Korea Question) 관련 방대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1945년 8월15일 일본제국 항복 및 조선해방, 1950년 6.,25 전쟁과 1953년 7월27일 정전, 1991년 9월17일 ‘대한민국’(ROK)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각각의 유엔 회원국 가입 등 현대한국 역사가 특정 회원국 차원이 아니라 유엔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가장 최근으로는 지난 해 북한체제의 반인류적 범죄 실태와 그에 대한 책임으로 북한 최고 지도자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시킬 것을 권고한 유엔총회 결의, 그에 따른 안보리의 ‘북한상황’(DPRK Situation) 논의 배경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 분단 70주년 주장을 뒷받침할 기록은 없다.오히려 이 같은 주장의 허위성을 밝히는 자료들이 널려있다. 분단 70주년 주장자들이 내세우는 소위 ‘38도’ 분단선은 사실 역사적인 차원에서 1894년 중·일, 1903년 러·일간에 한반도 분할문제로 논의된 적이 있으나 이들 국가 사이에 무슨 공식합의가 이뤄지지는 않았다.그 이후 일본제국 패망직전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한반도 북부에 진주했고 태평양에서 싸우던 미국은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들을 투하해 항복을 받아낸 뒤 해방조선인 한반도 남부에 들어섰다.
분단 70주년 주장자들은 당시 연합군 태평양 지역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미국)이 일반명령 제1호(1945년 8월15일)로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 일본군의 항복은 미국이 접수 한다”고 지시한 내용을 삼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한반도의 역사적 배경과 당시 군사적 상황(한반도에 각각 진출한 미·소군 무력충돌)을 고려한 연합군 사령관이 내린 군사조치로 연합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협정결과는 아니었다.
조선(한국)은 세계 2차 대전의 일부였던 미·일(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일본제국으로부터 무조건 행복을 받아내 해방됐다. 당시 일본의 항복을 앞두고 소련군은 미리 한반도 북부에 진주해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항복은 한반도의 해방이었지 독립이 아니었다.
일본 통치하에 (이씨조선) 조정이 무너져 사실 무정부 상태로 한반도가 해방되면서 세계 2차 대전에 승리한 연합군(Allied Forces)이 한반도 평화 및 안보 유지와 행정 책임을 떠맡게 된 것이다. 거슬러 더 올라간다면 역사는 일제 통치 훨씬 이전부터 조선을 중국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일종의 속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이 청·일 전쟁(1894년∼1895년)에 이어 러·일 전쟁(1904년∼1905년)에서 승리해 한반도를 차지하며 조선을 빼앗았다는 사실은 부끄럽고 치욕스럽지만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이다.
그러나 이를 떠나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된 무정부 조선을 관리하게 된 ‘연합군’ 중 미국, 영국, 소련은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미·영·소·중(중화민국)의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1945년 12월16일, 모스코바)는 내용의 합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 합의문에 따라 구성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한국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에 대해 협의(1946∼1947년) 했으나 의견을 모으지 못해 문제는 결국 당시 갓 출범한 유엔으로 회부됐다. 따라서 유엔은 1947년 11월14일 총회 결의(A/Res/112(II)(AB))를 채택해 한반도에서의 주민들이 민주주의적인 합법 자유선거를 통해 정부를 설립하도록 지원키로 했다.
‘한국 독립에 대한 문제’(The Problem of Independence of Korea)라는 제목의 결의는 구체적으로 해방 한국(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유엔 감시 하에 한반도에서 전국 주민투표를 실시토록 결의한 내용이다.
결의는 호주, 캐나다, 중국(중화민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소련사회주의공화국으로 ‘유엔임시한국위원회’(UNTCK)를 구성하고 위원회가 늦어도 1948년 3월31일 이전에 “한국인들의 즉각적인 자유와 독립을 위해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자유 비공개 투표로 한국인들을 대표하는 국회와 정부를 선출”하도록 주문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군의 지휘 아래 있던 한반도 북부 지역(38선 이북)은 이 선거를 거부했다. 한반도 독립을 위한 합법정부를 설립하기 위해 ‘유엔임시한국위원회’가 자유·민주 기치 아래 실시하려했던 평등·비밀·직접 선거를 북조선 공산당 세력이 배격한 것이다,
그 결과 1948년 5월10일 남조선에서만 선거가 실시돼 재헌국회의원들이 선출됐고 같은 달 31일 그들이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이에 유엔총회는 1948년 12월12일 “한반도에 거주하는 대다수 국민들이 자유적으로 선출한 ‘대한민국’이라는 합법정부가 설립됐다”며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정부이다”라고 결의(A/Res/195(III))했다.
이로서 ‘대한민국’(한반도 남조선)은 3년 4개월 전 일제 해방에 이어 독립했으나 앞선 유엔총회 결의(A/Res/112(II)(AB))가 추구한 한반도 전체의 자유와 독립은 이루지 못했다.
이어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화민국을 밀어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이듬해 1950년 6월25일 새벽 중국과 소련의 지지를 얻은 북조선이 “남조선해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해 한국전쟁(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문건 S/1496)을 일으켰다.
이에 유엔 안보리는 1950년 6월25일(S/1501)과 6월27일(S/1511) 결의를 채택해 회원국들이 대한민국 정부가 북조선의 불법 대남 무력 침략을 물리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제공토록 권고했고 유엔군(United Nations Command) 아래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5개국이 의료 및 각종 지원으로 참전했다.
이 전쟁은 1953년 7월27일 유엔군을 대표해 미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을 대표해 (북한)인민군이 ‘정전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을 체결해 현재 싸움이 임시 중단된 상태이다.
전쟁은 한반도를 초토화 시키고 정확히 셈할 수도 없는 군과 민간인 피해를 불러 일으켰으며 유엔 차원에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공식 분단하는 DMZ를 만들었다.
따라서 올해를 분단 70주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70년 전 해방 직후 국제사회(유엔)가 추진했던 한반도 전국에 대한 자유와 독립을 가로막고 결국 전쟁을 일으켜 남과 북을 분단시킨 북조선의 여러 훼방 행위들을 전격 부인하는 왜곡이다.
또 그에 대한 책임을 ‘외세’에 돌리는 선전·선동으로 올해 ‘세계 2차 대전 종결 및 유엔 창설과 해방 70주년’을 맞아 한국 정부와 국민이 후세들에게 반드시 올바로 가르쳐야 할 역사적 과제이다. yishin@koreatimes.com
북한 외무상이 1950년 7월2일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케이블 전보. 러시아어로 작성된 이 케이블은 바로 다음날인 3일 유엔 안보리 공식 문건(S/1554)으로 회람됐다. 북한은 전보에서 6.25 전쟁에 대해 "미국의 허수아비인 남조선이 무력도발을 일으켜 국가 방어 차원에서 대응했다"며 "남조선 해방 전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