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사회 열정.자부심 남다른 80대 카우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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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모자와 빨간 머플러, 청바지를 즐겨 입는 청년(?), 한인사회 웬만한 단체에는 다 한발씩 담그었던 하세종, 그는 80대 나이가 무색하게 열정적으로 오늘을 살고있다
▲유학차 미국으로
한국일보 오피니언난에 글을 쓰고 이런 저런 단체에 나가 원로로서 한말씀 하고, 그는 미국생활 60여년이 되어도 여전히 나이 먹지 않는 머리 허연 청년이다. 중학 1학년때부터 시작한 태권도가 4단으로 요즘도 매주 2~3번은 태권도장에 나가 운동을 하며 몸 건강, 마음 건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하세종은 1934년 2월 12일 서울에서 교육자 집안의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56년에 애리조나 주립대로 유학 와 비즈니스를 전공했다. 60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가려 했으나 4.19가 일어나고 다음해에 5.16이 일어나는 등 한국정세가 어지러우니 몇 년간 더 기다려보자고 주위에서 귀국을 만류했다.”
그의 어머니는 “전 국민이 전쟁후유증으로 허덕이고 있으니 공부를 잘 하고 돌아와 국민들이 잘 살게 하는데 보탬이 되라”면서 집안에 있는 모든 은수저를 팔아서 학비에 쓰라고 주었었다.
그 일을 잊지 않은 하세종은 공부를 더하고자 국제무역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62년 졸업과 동시에 미국회사인 매캐닉 에디션에 채용되었다. 62~71년까지 회사에서 선전기획 일을 하면서 자료 및 정보를 수집하여 판매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획득하는 일에 국제적인 감각을 키웠고 이는 장차 한인단체 창립 및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62년 뉴욕에 와서 맨하탄 렉싱턴애비뉴의 회사를 다니던 중 서상복 제1대 뉴욕한인회장을 만났다. “바쁘겠지만 한인회에서 조금이라도 일 좀 해봐” 하는 권유에 따라 봉사활동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브로드웨이 한인상가에 힘 보태
1968년 개정이민법이 발효되면서 쏟아져 들어온 한인 이민자들로 한인사회가 형성되던 70년대 중반, 맨하탄 32가에서 24가 브로드웨이 선상에 한인상가가 생겨났다.
하세종도 70년대 중반 ‘국제무역주식회사’를 차려 무역을 시작했다. 한국의 가방 회사와 연결하여 핸드백, 여행백, 구두, 군화 등을 수입 판매했는데 규모가 커지면서 작업화 에이전트 역할도 했다.
이는 그가 77년 뉴욕한인실업인협회(현 대뉴욕지구한인상공회의소) 결성에 관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초대회장으로 이영우, 2대 회장 김대현이 일했고 하세종은 2대 부회장으로 선임된다.
또한 그는 84년부터 5년간 페더럴 세이빙스 뱅크의 고문으로서 담보 없이 융자를 얻기 힘든 한인자영업자들에게 당시 3,000만달러 정도의 융자를 도와주었다. 브로드웨이 상가 형성에 한몫 한 셈이다.
▲18년만의 한국방문
하세종은 한국을 떠난 지 18년만인 73년에 모친 환갑을 맞아 서울로 나갔다.
미국에 오던 62년 편도 비행기티켓이 580달러, 당시 집 한채보다 비싼 가격이라 부산에서 150달러 승선료를 주고 배를 탔고 한달만에 시애틀에 내렸던 그로선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뉴욕한인사회가 커지면서 주류사회와 언어소통, 문화차이로 소통이 안되는 일이 많아 공공방송 채널 21(현 PBS)에서 한시간이라도 한국방송을 할 수 있기를 염원했다. 채널 21과의 방송 체결문을 갖고 한국으로 갔다. 정부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겠다면서 KBS-TV에서 경제개발 계획, 체육, 교육,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그램을 보내주었다.”
하세종은 맨하탄 사무실에서 직원 7명과 4개월의 준비를 거쳐 74년 3월1일 역사적인 한국어 방송을 시작했다. 이후 84년까지 한국 프로그램과 로칼 뉴스를 제작하면서 한국을 주류사회에 알렸고 한인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만들었다. 시청지역은 70여마일로 프로그램 중간에 광고를 넣었고 청취자가 늘어나면서 토요일 한시간 방송이 금요일, 토요일로 이틀 두시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골프를 같이 치던 지인들과 62년 골프협회를 만든 일은 이후 한국, 일본, 태국, 필리핀 4개국의 골프협회가 모여 1년에 두 번 친선 시합을 치를 정도가 규모가 커졌다. 각 나라 대사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76년~79년까지 이어지면서 5월이 아시아 문화 축제의 달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돈도 벌어야 하고 방송국 운영도 해야 하고 사회생활이 제한되어도 10년간 방송을 했다. 나중엔 광고가 들어오지 않아 무역회사에서 번 돈 다 집어넣었다. 결국 60만달러 적자를 내고 문을 닫았다.”
▲롱아일랜드 한인회
하세종이 롱아일랜드에서 살기 시작한 68년에는 한인 10여가구에 불과했으나 90년대에는 롱아일랜드 거주 한인들이 상당수였다.
“다른 지역한인회 움직임이 활발한데 우리도 한인들의 권익향상을 도모할 단체를 만들자”는 뜻을 모아 93년 4월 1일, 제1대 회장 한전수, 이사장 문시형을 주축으로 롱아일랜드 한인회가 출범되었다. 하세종은 제2대 회장(1995~1997)이 되어 카운티 정부와의 유대강화, 낫소카운티 한미문화축제, 한국학교 기금모금 등 열심히 일을 했다.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심어주자면 한글과 문화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 한국학교 기금모금을 계획하여 한사람당 3~4명씩 데려오라고 목이 쉴 정도로 전화를 해대었다. 행사당일 폭설이 왔는데 뉴저지에서도 다리 건너오고, 모두 320명이 모였다. 경비를 제한 나머지 기금은 낫소카운티와 서폭 카운티 두 한국학교에 나눠 전달되었다.”
하세종은 회장으로 있으면서 낫소와 서폭의 한국전참전용사회와 유대관계를 맺는 큰일을 해냈다.
▲롱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회
“82년 브루클린 도매상에서 군화 체인점을 할 때 군화를 사러온 한 미국인을 만났다. 그는 해병대로 6.25에 참전 중 부상당했다고 했다. 미 참전용사회 창설 동기가 되었고 95년 롱아일랜드 회장이 되면서 한미 유대강화에 힘썼다.”
하세종은 6.25전쟁 학도병 출신으로 51~53년 미8군 통신대 통역관을 지낸 경력으로 재향군인회와의 유대관계가 돈독하다. 평멤버, 이사, 제2수석으로 임원이 되면서 뉴욕주 총회 19개 지회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롱아일랜드 카운티 재향군인의 집에 100여명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산다. 가장 큰 일은 20년째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전쟁무용담, 한국민들의 고통, 한국군인의 용감성 등을 강연하고 실전 사용 무기를 보여주면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행사로 공립학교와 도서관, 한인교회 등을 방문하고 있다.”
▲뉴욕지역한인회 연합회 회장
미국에서 60여년간 살다보니 한인단체의 결성과 성장에 그의 발자취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가장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1995~2000년 5년간 한인회 산하 권익신장위원회장을 맡아 유권자 등록, 권익신장, 회관관리 등 세가지를 집중적으로 힘쓴 결과 800명을 등록시켜 오늘날 유권자 등록의 기반을 닦은 일이라고 한다.
“김재일, 김동석 등이 개인 도네이션을 많이 했다. 크리스마스에 오밤중에 오돌오돌 떨면서 편지를 만들어 중앙우체국에 가서 새벽에 부치기도 했다.”
95년에는 뉴욕지역한인회연합회(초대회장 윤용상)에서 초대간사로 일했으며 대뉴욕지구태권도협회 이사장, 2000년 월드컵 공동후원회장, 상록회 회장도 지냈다. 또 그가 애착을 갖는 것은 2000년 국악진흥회 회장을 1, 2,3대까지 하면서 미국내에 국악 활동이 활성화 시킨 점이다.
▲자부심 갖고 일해
“한인들을 위한 일을 하는 정치인이라면 당과 상관없이 돕는다“는 평소 소신대로 하세종은 댄 할로윈, 피터 구 후원을 했다. 특히 민주당 힐러리 상원의원 후원회장으로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한인후원회 모임에서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 같은 자리에 앉은 영광은 잊을 수가 없단다.
64년 결혼하여 증권회사 사장, 의사가 된 두 아들과 두 명의 손주를 둔 하세종, 은퇴 20년이 되었지만 지난 5~6년간은 한국 제약회사와 호주 제약회사간의 컨설팅을 맡기도 했다.
청춘을 보낸 애리조나 시절의 향수로 카우보이 모자를 10여개 이상 지닌 채 번갈아 쓰고 다니는 하세종, 그는 자신의 성격이 강한 탓에 빨강색 머플러를 하면 강과 강이 충돌하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무난해진다고 설명한다.
파격적인 옷차림이지만 썩 어울리는 그는 한인사회 활동을 하며 “자부심 갖고 일했다”고 말한다. 그는, 평생 한인사회를 주류사회에 접목시키기 위해 기여해 온 공이 크다. <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