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 칼럼] 김문철 목사 ㅣ 미생(未生

2015-02-11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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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이 시작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달이 훌쩍 지났다. 한해를 시작할 때면 의례 희망찬 계획들을 세운다.“올 한 해는 반드시 이루지 못한 것들을 성취하겠노라” 며 굳게 결심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현실은 희망을 약화시킨다. 희망과 현실 사이에서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 조각들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우리는 모두 완생을 원한다. 부족함 없이 다 성취해서 100% 만족스러운 삶을 꿈꾼다.

항상 사랑스러워 칭찬 받고, 항상 의로워 인정받고, 항상 성공해 풍요롭기를 꿈꾼다. 하지만 그런 삶이 과연 이 땅에 존재할까? 설령 남들이 보기엔 완생처럼 보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여전히 무엇인가 모자라고 불충분한 미생 아닐까? 내 생각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완생은 이 땅에서 불가능이다. 단지 완생을 추구할 뿐이다.


성경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자격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생들로 제한한다. 조금도 죄가 없는 의인이어야 성경은 완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완생이 가능할까?

성경에 나오는 많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었다. 특별히 남다른 의를 과시했던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완생이라고 자부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다.

한 바리새파 유대인 부자 청년이 있었다. 그는 의로워 인정받고, 성공해 풍요롭고, 완벽해 자신만만했던 그야말로 완생이었다. 이 완생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뻐기듯이 질문한다: “선생이여,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지요?”말하자면“나는 완생이매 천국에 들어가는 것 당연하지요?”를 확인하고 싶은 질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대답을 하신다:“네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래? 그리고 나를 따르면 완생이라고 인정해줄께.”(눅 18:22). 그 한마디에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근심하며 돌아간다. 스스로 완생이라 믿었으나 착각 속에 살아왔던 미생임을 자인한 꼴이다.

하나님 앞에 완생은 없다. 모두가 미생일뿐이다. 그런데 신비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생이 가능하다고 선언하신다. 부족한데 완벽하다고 받아주신다. 죄인인데 의인이라고 인정하신다. 그 유일한 조건은 단순하다.“하나님 저는 미생(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 뿐이다.

그러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신비함이 펼쳐진다.(25) 불가능이 가능해진다. 미생인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완벽하신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한 일이다.(27) 기독교가 말하는 십자가의 역설이다. 기독교의 핵심인 은혜가 주는 놀라움이다.

인생은 바둑판에서 아직 완전한 집을 짓지 못한 바둑알(미생)들의 치열한 싸움터와 같다. 생존을 위해 모두가 물고 물리는 전쟁을 벌여야 한다. 삶의 전쟁터에서 모든 미생들은 왕따, 처절한 외로움, 기약없는 내일, 실패, 그리고 작은 성취감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작년에 이 땅의 모든 미생들에게 위로를 주었던 드라마 미생 에서 등장한 몇몇 대사들은 우리 인생에 울리는 메아리처럼 새겨둘 필요가 있다: “돌을 잃어도 게임은 계속 된다.”“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간다는 거니까.”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죽을때까지 실패와 버티기 게임일 수 있다. 그런 중에 완생의 모습으로 잠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인생게임에도 분명한 구별은 있다.“예수 안에서”만이 완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삶은 돌을 잃고 실패해도, 버티기가 버거워도, 알 수 없는 미래로 불안하고, 힘겨운 현실로 고통에 직면해도 결국에는 복된 삶이다. 완생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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