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큰 병폐 중 하나는 불신이다. 뭘 해도 서로 믿지를 않는 것이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 믿지를 못한다는 것은 사실상 관계의 악화 내지는 파괴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수많은 관계들로 엮어진 한 사회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한 사회적 불순요인이 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현대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불신’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때이다.
이런 역기능적 상황을 순기능으로 바꾸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는 그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자들이다. 예를 들어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다. 정치가, 학자, 고위 공무원, 그리고 종교인들이 그들이다. 지금의 사회가 불신의 사회가 된 게 이들의 표리부동이 큰 원인이었음을 시인한다면, 이제 이 사회가 신뢰의 사회로 바뀌기 위해서는 이들의 뼈아픈 자성과 진지한 변화의 노력이 필요하다.
진짜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그리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그는 남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무슨 ‘신뢰감 쌓기 101’, 이런 식의 공부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는 좋은 방향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는 ‘바른생활 doing 목록’ 같은 것을 만들어 학습하며, 내가 이를 잘 해내면 이런저런 좋은 영향을 미치겠지, 이러면서 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좋은 ‘being’의 소유자가 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러고 있는 그의 영향을 받는다. 바로 이 점이 테레사 수녀,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손양원 목사 같은 분들이 존경 받는 진짜 이유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인이나 종교인들을 보면 이런 식의 진정성이 느껴지질 않는다. 본심은 정치적 영향력에 더 가 있다. 그 본심 달성을 위해 일시적인 긍정적 이미지를 연출할 뿐이다.
그런데 그게 금방 발각되고 만다. 그러니 더 신뢰가 안 가는 것이다. 사실 이 글은 자성적 차원에서 쓰고 있다. 난 목사로서 언제부턴가 어떤 의도적 연출을 위해 사역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교를 해도 영향력만 생각하고 했던 것 같다. 책을 써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야 할 텐데, 하며 써 왔던 것 같다. 주로 먼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영향을 주는 ‘내 자신’보다는 남이 나로부터 받을 영향‘력(力)’이었다. 문제 있는 자세라고 생각된다. 한 지역교회를 책임지며 영향을 미치는 목사로서 말이다.
최근 책 한 권을 출판했다. 그 책 안에는 좋은 내용들이 많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내용의 최대의 수혜자는 과연 누구일까? 누구 좋으라고 그 글들을 썼단 말인가?
예를 들어, 책 4장에서 하루의 중요성을 열심히 설파했는데, 그럼 그토록 그 주제를 강조했던 내 자신은 정작 내게 주어진 ‘하루(현재)’를 신앙 안에서 진지하게 맞이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자성적 질문들을 해 본 것이다. 그에 대한 나의 답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내 책의 최대의 수혜자는 바로 남 아닌 내 자신이라는 거였다. 목사는 매주 ‘설교’라는 것을 한다.
설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풀어 청중들을 설득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설교자인 나부터 그 설교에 설득당하고 있는가? 내 설교를 가장 확실하게 누리는 자는 내 자신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남에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화자 자신이 감동하지도 못하는 진리를 가지고 어떻게 남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이는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그런데 이 앞뒤 안 맞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니까 이 사회가 불신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진심이 통하는 사회를 꿈꿔본다. 그러나 그 진심을 보여 줄 수 있는 ‘진심의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
다시 말해, 진심이 통하는 사회가 되려면 진심 자체에 더 신경 쓰는 자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사회로 돌아가기에는 사실 너무 많이 와 버린 감이 있지만, 그래도 겸손하게 진심의 사람들이 되려고 애쓰는 자들이 생길 때에만 이 사회가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