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동산업계에 38년...뉴욕시내는 GPS 없이도 환하죠
38년 경력의 홍종학 한미부동산 대표, 그의 머릿속에는 퀸즈를 비롯 뉴욕 시내 지도가 환하게 펼쳐져 있다. 오늘도 플러싱 거리를 바삐 오가며 한인자영업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를 만났다
▲한인상권 지키기
한인밀집지역 퀸즈 플러싱, 지금 그곳에는 플러싱 커먼스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자동차 경적소리와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 거리는 살아있다. 플러싱의 과거와 현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홍종학, 그는 이곳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본다.
“현재 유니온스트릿과 노던블러바드와 나란히 가는 37, 38, 39애비뉴, 루즈벨트 애비뉴, 41애비뉴 선상에 한인 150여개 가게가 성업 중이다. 플러싱에 중국인이 60%라고 밀려난다 생각하지 말고 이를 거꾸로 활용해야 한다.
이미 한국식당, 액세서리, 한국 프랜차이즈 빵집, 한국화장품과 의류가게에 중국인 고객이 상당수다. 공사 중인 공영주차장 뒤편에 파킹장이 있다. 3여년후 주상복합단지가 완공되면 지하 2,3층 주차장에 확장된 상업용 공간의 유동인구가 엄청나리라 본다.
한인들이 단결화합하여 상권을 지켜나가면 앞으로 플러싱 한인상가는 더욱 번창할 것이다.”
홍종학은 한 달에 1~2번 퀸즈보로청에 가서 파킹장 문제를 비롯 상가의 민원해결을 하는 유니온 소상인연합회(회장 임익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메인 스트릿에 있던 50~60개의 한인 가게는 치솟는 렌트로 인해 문을 닫았다. 유니온스트릿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에 홍종학은 “유니온상가 60~70%가 한인이 건물주다. 과거에 비해 한인들이 오너십을 가져야한다는 인식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한글로만 간판을 달지 말고 타인종 고객을 위해 영어로 크게, 그 밑에 작게 한글 상호를 달아야 한다”고도 조언한다.
▲플러싱의 지각변동
“뉴욕시내는 GPS 없이도 다닌다. 정확한 주소를 몰라도 대강 설명만 듣고도 찾아갈 수 있다 ”는 그의 말은 부동산업계에 몸담은 지난 38년간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았는지를 보여준다.
“한인이민자들이 뉴욕에 오면 가장 먼저 렌트 아파트를 찾고 그다음에 가게를 산다. 5,6년 후에는 집을 사고 7, 8년 후에는 투자할 패밀리 하우스나 작은 상가를 산다, 그 후 2, 3개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큰 것으로 이동한다.”
한인이민사 정착과정에 홍종학이 있었다. 1978년 한미부동산 설립이래 에이전트 20~100명이 부동산시장에 따라 활발하게 움직이며 아파트 렌트계약, 단독하우스, 상가 매매 등을 성사시켰다.
“109경찰서에서 노던블러바드 가는 길에 단독하우스 네 채가 있었다. 두 채는 이태리인이 사들여 아파트를 지었는데 렌트가 들 건지 걱정했다. 내가 이름을 서울프라자로 하면 한국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라 했더니 정말 그렇게 되었다. 다른 두 채는 중국인이 사들여 레인보우 플라자가 되었다.
유니온 상가 자리에는 포드자동차 정비소와 쇼룸이 있었다. 중국인개발업자 토마스 황이 84년에 유니온 상가를 만들었고 한인 90%정도가 입주했다. 또 여러 건설업자들이 노던블러바드 건너 개스 스테이션 자리, 잡초가 우거진 프린스 스트릿 지역에 건물을 지으면서 사람들이 플러싱으로 몰려들었다.”
그의 말은 플러싱의 역사가 된다.
30년대에 유럽 유대인이 정착했고 이태리, 그리스계 이민자를 거쳐 70년대 초반 한인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허허벌판 플러싱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플러싱한인회 제3대 회장
80년대에 메인 스트릿, 루즈벨트 애비뉴, 유니온 스트릿 선상에 한인 상권이 형성되면서 플러싱 다운타운에도 한인들이 몰려들었다. 한식당을 비롯 수많은 업종의 한인 가게가 몰리면서 자연스레 플러싱 한인상인번영회도 생겨났다.
“한인이민 첫 정착지로 플러싱이 부각되면서 한인사회가 발전하고 80년 플러싱한인상인번영회가 결성됐다. 2년 후인 82년 중국계상인번영회가 만들어질 정도로 한인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홍종학은 1982년 플러싱한인회 제3대 회장으로 추대된다. 그는 상가화재사건, 자체방범망 구축, 관할 109경찰서와 유대관계, ‘82 플러싱업소록 발간(한인업소 120개), 후러싱 축제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후 플러싱한인상인번영회 이름은 플러싱 번영회, 플러싱한인회를 거쳐 현재 퀸즈한인회가 되었다.
현재 한인상가는 1997년 말 홍콩의 중국 본토 반환으로 중국 자본이 밀려오고 중국계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노던블러바드로 확장돼 리틀넥, 그레잇넥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이 모든 변화를 플러싱 터줏대감 홍종학은 지켜보고 있다.
최근에는 KCS 소유권 문제로 중단되었던 퀸즈한인회 동포회관 긴급대책모임에 전직 플러싱한인회장의 최고원로로 참여하여 동포회관 프로젝트 진행 재추진이란 결론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홍종학은 1984년부터 5년간 퀸즈한인문화위원장으로 한국문화 보급에 힘썼고 1990년대에 시작된 한중합동 루나 뉴이어 행사 등 한인사회와 중국인 사회 화합행사뿐 아니라 정치인 후원에도 열심이다.
“소수민족을 상대로 돈만 벌고 백인동네로 가 살면 우린 늘 이방인이다. 이곳에 뿌리를 내려 지역사회와 공존하는 코리안이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1세들이 2세, 3세를 메인 스트림으로 내보내야 한다.”
1993년 한인민주당연합회 참여를 시작으로 마리오 쿠오모, 게리 애커맨, 조셉 크라울리, 헬렌 마샬, 스타비스키, 멜린다 캐츠 등 이름만 대어도 알만한 미 정치인 후원을 해왔고 특히 론 김을 최초의 한인 뉴욕주 하원의원으로 배출시키는데 큰 힘을 보탰다.
▲부동산정보 제공
1945년 8월14일 태어난 홍종학은 마산중.고를 나와 경남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창원· 합천·창녕 중.고등학교에서 사회·영어교사를 했다.
그가 미국에 이민 온 것은 1974년, 간호사 부인 이영애는 펜실베니아 하스피탈에 근무했고 버펄로와 뉴욕을 오가던 그는 75년 부동산 라이선스를 받으며 76년 말 뉴욕에 정착했다. 건축 일을 잠시 하다가 매클라클렌 부동산 에이전트 생활 2년 후 한미부동산을 설립했는데 ‘틀림없다’는 입소문을 타고 한인 고객들이 몰려들었다.
2001년부터 2010년 10년간 한미부동산 학교를 운영, 500명이상의 전문인을 양성했고 1997년 재미부동산협회 창설회장으로 부동산 박람회를 시작했고 이후 매년 열리는 박람회를 통해 부동산 관련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2008년 뉴욕연방예비군(75년) 출신으로 커뮤니티 봉사자에게 수여하는 제3회 낫소카운티 보훈상, 2002년 엘리스 아일랜드 상을 받았다. 그 외 여러 단체로부터 받은 감사패, 공로패는 무수하다.
“요즘은 일을 좀 줄였다. 6년 전부터 은퇴자들의 투자 상담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5번 정도 사무실에 나오는데 주로 출근 전이나 퇴근 후에 사람들을 만나 좋은 투자처를 알선해주기도 하고 결정하는데 조언을 하기도 한다. 부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로케이션이다.”
▲부동산은 꾸준하다
홍종학은 아내 이영애씨와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다. 집안에 하버드, MIT, 예일대, 컬럼비아 등 아이비리그 졸업생이 골고루 있을 정도로 자식 농사를 잘 지었고 결혼한 두 딸은 손주 5명을 그의 팔에 안겨주었다.
홍종학은 플러싱에 한미부동산 5층 건물을 비롯 몇 개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뉴욕일요산악회에서 마추픽추를 가는 등 등산을 좋아하나 시간이 많이 걸려 요즘은 가지 않고 있다.
“여러 자원을 보유한 미국경제가 조만간 괜찮아질 것이다. 부동산은 대박은 아니지만 꾸준하다. 올해 부동산 경기도 좋아질 것이다.” “처음 이민 가방 들고 미국에 왔는데 아파트 한 달 렌트와 보증금 내고 나니 얼마 남지 않았다.
한 달반 동안 취직이 안 되고 수중에 돈이 떨어져 아내의 친구에게 100달러를 빌리기도 했다. 그런 적이 있었나 싶다. 생활 안정이 되고 자식들 공부를 시켰고 나름의 지역사회 봉사를 하고 있다. 크게 성공한 한인들이 많다보니 나는 그저 이만하면 무난하게 살아왔다 싶다.”
그의 차분하고도 사려 깊은 단어 선택이 집을 구하는데 꼼꼼해야 하는 부동산 중개인이 천직 같다는 인상을 준다. <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