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픔 딛고 우뚝 솟은 프리덤타워
▶ 삼엄한 경비.차단막 상처흔적 곳곳에
연말을 맞아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된 원 월드트레이드센터 로비 모습.
맨하탄 다운타운과 스태튼 아일랜드를 왕복하는 페리에서 바라본 원 월드트레이드센터 전경.
2001년 9월11일 두 대의 비행기가 뉴욕의 심장, 아니 미국의 심장부를 관통했다. 그렇게 무너져 내린 월드트레이드센터 건물은 뉴요커를 비롯한 미국인들에겐 치유가 어려울 것 같은 상처로 남았다. 그렇게 13년이 흐른 2014년 11월3일. 이 자리에 푸른 색채를 띤 104층 높이의 원 월드트레이드센터(1WTC)가 문을 열면서 뉴욕 맨하탄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그린다.
상처 부위에 마치 새살이 돋아나듯 우뚝 솟은 1WTC. 이 새로운 1WTC는 상처 치유를 넘어 다시금 미국의 심장 기능을 회복하고, 새 시대를 향한 거대한 발돋움을 내딛는다는 자신감과 기대감으로 충만해 보였다.
■프리덤 타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1WTC가 월드트레이드 센터를 구성하는 6개 건물 중 하나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9·11테러 공격을 받을 당시에도 모두 7개의 월드트레이드 센터 건물이 무너졌지만 가장 높은 두 개의 쌍둥이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만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업무단지 성격을 띠고 있는 월드트레이드 센터는 숫자로 각 빌딩을 구분해왔고, 이번 새 빌딩들에도 숫자를 넣었다. 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1WTC가 ‘원(one)’이라는 숫자를 부여받은 것이다. 현재는 1WTC 외에 74층 높이의 4WTC와 29층의 7WTC 등 건물이 완공된 상태로, 2WTC(79층)와 3WTC(80층), 5WTC(50층)은 공사가 한창이다. 이 때문에 기자가 1WTC를 방문한 19일에도 현장에는 추모객들의 엄숙함 속에 공사소리가 배경음처럼 흘러나오듯 했다.
프리덤 타워(Freedom Tower)라는 별칭을 지닌 1WTC는 건물 꼭대기에 설치된 첨탑(안테나)까지 1,776피트(541.3미터)가 공식 높이다. 미국 독립기념 연도인 1776년의 상징성을 부여받은 탓이지만, 실제 첨탑 끝까지의 높이는 약간 높은 1,792피트(546.2미터)다. 무너진 쌍둥이 건물(1,727피트)보다는 65피트 높고, 1WTC 완공 전까지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영위를 누렸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1,454피트)보다는 키가 338피트 크다.
■공사비만 39억달러
1WTC의 운영을 맡고 있는 조직은 뉴욕주와 뉴저지주가 공동으로 설립한 ‘항만청(Port Authority)’이다. 항만청은 9·11테러가 발생한 2001년부터 지금의 1WTC를 추진해 2년 만에 모든 계획을 완성하고 2006년 공사에 착수했다.
최초 계산된 공사비는 39억달러. 이중 10억달러는 보험회사 보상금에서, 2억5,000만달러는 뉴욕주가 주머니를 털고, 또 항만청이 채권을 발행하기로 했다. 그래도 한참 모자란 공사비용은 결국 항만청이 관장하는 뉴욕과 뉴저지의 다리와 터널 통행료에서 충당했다. 그래서 조지워싱턴 브릿지를 비롯한 항만청의 다리 통행료는 14달러에 달한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현재의 1WTC는 104층 높이지만 실제론 94층을 사무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현재까지 출판재벌 콘데 나스트와 맨하탄 소재 대형 로펌이 이주를 마쳤고 중국 무역기구 차이나 센터 등이 입주를 약속했다. 하지만 건물 94개 층을 채우기엔 한참 부족한 상황이다.
9·11 테러 전까지 쌍둥이 건물에는 LG증권과 현대증권, 한국 지방정부센터 등이 입주해 있었지만, 1WTC에 입주하겠다고 밝힌 한국 기업은 아직 없다.
■추모객들의 발걸음 이어져
웅장한 1WTC의 위용 속에서도 9·11테러의 상처는 아직까지 곳곳에서 목격됐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삼엄한 경비. 추운 날씨였음에도 1WTC 주변에는 많은 경찰과 군인들이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특히 차량이 진입하기 위해선 바닥에 설치된 육중한 차단막을 몇 개나 거쳐야 할 정도였다. 옛 쌍둥이 건물이 자리해 있던 곳에 들어선 2개의 ‘추모의 폭포’와 그 옆 ‘9·11 추모 박물관’에는 관광객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당시의 아픔을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2011년 완공된 추모의 폭포는 쌍둥이 건물의 네모반듯한 자리를 깊게 파 물을 흐르도록 만든 곳이다. 그 주변 벽면엔 2001년 건물에 남아있던 희생자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들어갔던 경찰과 소방관 등 2,977명과 1993년 발생한 월드트레이드 센터 테러 희생자 6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간간이 이름 위에 꽃이 올려진 경우도 있었다. 아직까지 수습되지 못한 시신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은 일부 유족들에겐 사랑하는 이가 묻혀있는 묘지라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곳을 찾은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신의 한 관광객은 “젊은 시절 쌍둥이 건물 위에 올라본 적이 있다”며 “이젠 다 무너진 자리에서 느낌이 새롭다”고 말했다. 오는 3월 1WTC도 전망 공간을 일반에 개방할 예정이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새살이 돋아난 자리에 상처 이전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것이다. <취재=함지하 기자.사진=천지훈 기자>
한때 세계 최고층 건물로 위용
기업.관광객 넘쳐 ‘거대도시’별칭
1993년 폭발테러 등 테러협박 잦아
■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역사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대한 구상은 지난 1939년 현재의 한인 밀집지역인 플러싱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에서 나왔다. 당시 뉴욕·뉴저지 항만청은 무역을 통해 전 세계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며 수년 내에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비용이라는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본격적인 건립논의는 20년이 지난 1959년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당시 라커펠러 가문의 데이빗 라커펠러가 맨하탄 동쪽의 이스트리버와 맞닿은 부지에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짓겠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들고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20년 전의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하지만 최초 부지로 지정됐던 곳의 매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 현재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부지가 최적의 장소로 낙점돼 첫 삽을 1966년에 뜰 수 있었다. 실제 쌍둥이 건물은 각각 1968년과 69년 차례대로 지어지기 시작됐다. 건물이 한층, 한층 올라가면서 1970년 쌍둥이 건물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이 영광은 시카고 시어스타워(현 윌리스타워)가 완공되기 전까지 3년간 유지된다.
1973년 쌍둥이 건물이 본격적인 개장을 한 직후부터 해당 건물에는 입주 기업이 넘쳐나고, 관광객 방문이 끊이질 않았다. 하나의 거대 도시라는 별칭도 붙었다. 하루 상주인구만 약 8만명. 이들이 마시는 커피가 하루 3만 컵, 먹는 음식은 87톤이나 됐고, 건물에 설치된 냉난방기는 하루 6만톤의 공기를 식히고, 데웠다. 쌍둥이 건물을 포함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 내 건물들에 설치된 239대의 엘리베이터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하지만 이런 상징성 덕분에 크고 작은 사건, 사고의 타깃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74년 필리페 페티라는 곡예사가 1동과 2동 사이에 외줄타기를 하다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폭탄을 설치했다는 협박 전화가 자주 걸려왔고, 크고 작은 화재도 발생했다.
그러던 중 1993년 2월26일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지하주차장에 폭발물을 실은 차량을 세워두고 도주, 결국 큰 폭발을 일으켜 7명이 사망하고 1,042명이 부상을 당하는 테러사건이 일어나 뉴욕을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체포된 알카에다 조직원들은 자신들의 테러는 단지 시작일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2001년 9월11일이 찾아오면서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시계는 멈춰버렸다. 알카에다의 경고가 현실이 될 줄 그 때까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