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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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체스터/칼럼: 나눌수록 채워가는 삶

2014-12-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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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실 <연합감리교회 뉴욕연회 여선교회장>

연말이 가까워오면 알록달록한 전구 빛으로 물들은 상점과 대할인 표시판은 우리들의 발걸음을 쉽게 안으로 끌어 들인다. 더구나,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덕분에 쉽게 내려앉는 기분과 추워서 움츠려지는 몸은 이러한 화려한 상점의 축제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게 되면서 올해에 내게 따뜻한 마음을 주었던 이들을 위해 정성어린 선물들을 하나둘씩 주워 담으며 흐뭇해진다. 어려서는 선물을 받는 것이 기쁨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누어 줌이 기쁨이고, 나눌 수 있는 이들이 있어 행복하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감사해진다.

이민 생활의 어려운 이야기들은 사람마다 이민 왔던 당시의 나이와 환경에 따라 적응하는 방법도 다르고 경험들도 무척 다양한데, 고등학교 때에 시작된 나의 이민 40여년의 생활 역시 쉬운 것은 아니었다. 동양인들의 이민을 금지했던 미국법이1960년대 말에 바뀌면서 한인들의 이민이 가능해졌으나 1970년대 말이 되어서야 한인 이민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으니1970년대 초에 이민을 오게 된 우리는 주위의 많은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1969년 거의 50세에 사업의 실패로 모든 재산을 잃고, 어린 다섯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뉴욕으로 혼자 떠나기로 결정한 내 아버지의 용감하고 무거운 발걸음은 그런 부러움과는 동떨어졌던 상황이었으며 이는 우리 가족 이민역사의 시작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가 허락한 미화 현금 100달러와 가방 두 개를 갖고 American Dream을 꿈꾸며 이곳에서 수출업을 시작하여 만 3년의 고생 끝에 나머지 식구들이 영주권을 받고 뉴욕으로 이주 할 수 있게 이국에서의 삶을 개척하셨던 내 아버지의 삶의 이야기는 눈물과 도전으로 얼부러진 한 권의 책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1970년대 초에는 맨하탄 115가 컬럼비아대학 옆 1921년에 세워진 우리 “뉴욕한인교회”와 조금 남쪽에 위치한 지금은 없어진 작은 한인 장로교회뿐 이였고, 이 지역 한인들이란 거의 줄리아드 음악학교와 컬럼비아 대학원 유학생들이었으며 1950-60년대에 유학생으로 왔다가 졸업 후 정착한 전문직에 종사한 이들 이였다. 한국 음식점과 식품점은 42가에 위치한 “삼복” 하나였고, 김치가 먹고 싶어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시절에 고등학교로 전학하여 거의 알아듣기 힘든 강의를 듣고, 매일 밤 영한사전을 찾아가며 숙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난 후 숙제를 시작했던 나의 사춘기시절, 외워도 외워도 매일 새로 터져 나오는 영어 단어들에 지쳐 작아져만 갔던 자신감, 부모님의 노력으로 어렵게 마련된 대학 등록금으로 졸업 후 교사로 봉직하고, 결혼하고 딸을 출산하여 어머니의 역할을 하며 인내함을 배웠고, 5년 전 은퇴하기까지 26년의 교편생활을 잘 마쳤으며, 몇 달 전 쌍둥이 아가들의 할머니가 되어 보스턴 지역에 사는 딸네를 드나들며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녀들에게 실컷 사랑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삶을 갖게 된 이 모든 것들은 대단한 축복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내 생활 속에는 교회 생활이 언제나 가운데를 차지하여 이를 통해 이웃 사랑을 배우고, 나눔을 실천하며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내 가진 작은 것들이나마 이웃과 나눌 때에 내 갖은 것들이 더욱 채워지고 풍성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매 번 경험하며, 은퇴하고 풀타임으로 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에 동참하여 내 마음에 축적되는 풍요함은 한 해를 돌아볼 때 더욱 감사하기가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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