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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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초대/ 강콜렉션 아트 딜러 강금자 씨

2014-11-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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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큐레이터와 감성일치, 아트 딜러로 성공비결”

▶ 한국 민화에 빠져 세계에 한국미술 알리기 34년

한국미술품을 미국과 유럽 미술관에 소개하고 파는 아트 딜러 강금자씨, 그는 지난 1981년 맨하탄 에 강콜렉션을 열고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고 보급하는데 모든 정성을 쏟고 있다. 한국 미술품을 사랑하는 그의 삶을 들어본다.

▲세계의 박물관을 상대
아트 딜러는 탁월한 감식안은 기본이고 해박한 지식과 견해가 따라야 한다.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전 세계의 미술관 아시안 큐레이터를 대상으로 한다면 전문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여야 한다. 이런 일을 34년째 해오고 있는 강콜렉션 아트 딜러 강금자,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평생 해오는 일에 너무 만족한다. 그 즐거움이 지난 5년간 적자가 나면서 닫는다, 닫는다 하면서도 열게 만들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이후 2008년부터 갤러리 운영이 완전 스톱했다. 만 5년간 50만달러 이상을 잃어버렸고 5명 직원이 한명 남았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며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작년 3월 대영박물관 아시안 디렉터가 매화 병풍과 그림을 비롯 여러 작품을 패키지 딜로 구입해가면서 점차 경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아트 딜러 강금자가 상대하는 박물관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을 비롯 영국 대영박물관, 브루클린 박물관,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박물관, 하버드대 아서 새클러 박물관, 시애틀 박물관 등이다.

박물관은 콜렉터의 기증을 받지만 직접 작품을 구입하기도 한다. 박물관과의 거래는 그가 미국에서 서양미술사를 공부한 눈으로 고미술품을 선택하기 때문에 외국 큐레이터의 감성과 일치하기 때문이고 또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해외인사초청 사업을 통해 박물관 큐레이터들이 강콜렉션을 안 덕분도 있다.

아시안 아트페어 기간에 강콜렉션에서 열린 강익중 전시회를 본 대영박물관은 올 3월 화려하고도 우아한 최근작 ‘삼라만상’을 구입해갔다. 사실 강금자는 지난 2000년 대영박물관이 한국관을 개관하기 이전부터 꾸준히 관계를 유지해왔다. 강콜렉션에서 한국 고미술품을 많이 구입했고 그는 그 이상으로 많은 작품을 기증한 바 있어 대영박물관과 20년이상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9년전 텍사스 샌안토니오 박물관이 한국 갤러리를 오픈하면서 강콜렉션에서 화조도 병풍을 구입 전시했고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미술관 개관시 한국실을 위해 5년 전부터 매년 10여점의 작품을 기증해 오며 쌓인 신뢰가 자문 요청도 하게 했고 계속 작품구입을 하게 했다.

▲고미술품에 눈 뜨다
“1974년 시아버님 환갑으로 11년 만에 한국에 나갔다. 인사동에 나갔다가 강렬하고 독특한 민화를 본 순간 너무 좋아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순간 한국 고미술품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78년에는 아예 한국으로 이사 나갔다.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인 남편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서 수입이 많았는데 그 돈으로 신라토기를 사들였다. 한국 예술의 전당을 지은 건축가 남동생 김석철이 남편의 서재에 크고 근사한 책장을 직접 짜주었는데 책들을 모두 바닥에 내려놓고 그 자리에 신라토기 백여점을 진열했다. 몇 만달러를 눈깜짝할 사이에 다 쓰고 자기 책들이 바닥에 뒹굴어도 남편은 내가 번 돈 왜 다 쓰냐, 그걸 왜 사들여 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한 번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뭐라 말한 적이 없다. 나는 평생 남편에게 많은 빚을 졌다.”

서재에 신라토기가 넘쳐서 침실에도 진열하는 그에게 남편은 ‘밤에 발이 움찔하는 것이 귀신이 나오는 것같아 무섭다’고 한마디 했을 뿐, 참으로 그는 남편 외조 복도 타고 났다.


한국에 있으며 미8군 메릴랜드 대학에서 한국 문화사와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었다는 강금자는 동부이촌동 외인촌에서 유명했다. 새벽부터 ‘사모님 계시냐’며 집 초인종이 울렸다. 전국 각지 시골에서 신라토기를 팔러오는 물결이었다.
“자형, 누나가 미쳤수, 그걸 사다 다 어쩌려고?” 보다 못한 동생이 말했지만 그는 “고미술품 딜러가 될거야” 하고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렇게 모은 고미술품을 들고 뉴욕으로 돌아온 강금자는 1981년 강콜렉션을 열었다.

▲혼자 뉴욕으로
“1982년 연방공무원인 남편이 사우디 아라비아로 가게 되었다. 나도 따라갔다가 비즈니스를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에 몇 달 후 혼자서 뉴욕에 돌아왔다. 슬퍼하는 남편과 둘째아들 필립을 떠나 강콜렉션을 다시 열었다. 그 후 3년간을 두달에 한번씩 뉴욕과 사우디를 오가면 비즈니스를 계속하자 많은 미국 여성들이 나를 보고 무섭게 끈질긴 사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때 미국의 유명한 박물관들을 방문하면서 쓸 만한 한국 고미술품들이 없다는 것을 느끼곤 더욱 열심히 개척하게 되었다.”

세태도 한국 고미술품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88서울올림픽이후 영국 박물관, 미국의 각 박물관에서 한국 고미술품을 찾았고 한국 경제력이 높아지면서 가격도 올라갔다. 1989년 소더비경매에서 한국불화가 1만달러 예상가를 깨고 46만달러에, 1990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겸재정선 화첩이 예상가 6,000달러 40배인 24만달러에 팔렸다.

한국전 참전용사, 외교관 소장품, 일본 식민지에 반출되었던 작품이 나오면서 90년대 미술시장에 한국미술품 붐이 일었고 메트박물관에도 한국관이 생겼다.

아트 딜러 강금자는 작가 정신이 깃든 19세기 한국의 산수화를 좋아한다. 강렬한 채색화인 19세기 민화와 불화의 정직한 선, 19세기 책거리 병풍의 정교한 아름다움도 좋아한다. 일본은 기교적이고 중국은 요란하지만 한국 고미술품은 자연스러운 품위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낀다. 그가 박물관과 거래한 고미술품은 수묵화, 동자상, 토기, 호랑이와 용 회화, 병풍, 문방사우 등 종류가 다양하다.

▲현대화가 대세인 미술시장
1941년 함경도 안변에서 출생한 강금자는 경남여고와 서울대 치의예과 2년을 다녔다. 수술이 너무 싫어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입사, 1963년 마이애미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에 출전한 미스코리아 통역 및 취재차 왔다가 미국에 눌러앉았다.

퀸즈 칼리지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컬럼비아대학원 동양미술사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동양미술은 중국과 일본 미술사만 취급했고 한국미술은 말 그대로 황무지였다.

“요즘 뛰어난 한국 고미술품이 없다보니 크리스티와 소더비에서 한국 고미술품 경매를 안 하고 있다. 현재 세계 미술시장에서 현대화가 대세다. 1900~1970년 한국 현대화도 인기다. 한국 것이 40~50개 나오면 일본 것은 200~300개가 나왔는데 최근에 중국이 올라오면서 일본 것도 밀려났다.”

시대 흐름에 따라 강콜렉션도 10여년 전부터 고미술품과 현대미술품을 자연스레 함께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침장(針匠) 고 최복희씨가 궁중복장을 재현해 낸 작품 120벌이 강콜렉션에 기증되어 대영박물관, 버지니아, 브루클린 뮤지엄 등에 기증하기도 했다.

▲내년 3월 기획전 준비 중
강콜렉션은 내년 3월 기획전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Paintings by Artists from NY and Seoul’ 을 연다. 한국 작가로 서세옥, 중광스님, 민경갑, 허수영, 뉴욕 작가로 강익중, 김원숙, 곽선경, 안성민, 황란의 작품 전시를 준비 중이다.

강금자는 강병식씨와의 슬하에 피터, 필립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피터는 크리스티 인스티튜트 현대미술사 석사 출신으로 앤디 워홀 파운데이션에서 일하고 차남 필립은 필름 제작 일을 한다.

아트 딜러 강금자는 박물관에 한국작품을 소개하고 파는 한편 한인사회 행사에도 가능한 부지런히 참여하고 있다. 알재단 주최 한국미술가 강연회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도자기 예술’ 초청강사로 재능기부를 했었고 알재단, 가정상담소. 한인커뮤니티 재단 기금모금행사에 작품을 기증했다.

통 큰 일을 하면서도 인간관계가 따스한 여걸 강금자, 그는 한인들의 관심과 성원이 한국미술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앞장서 보여주고 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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