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20대 1 경쟁률 뚫고 입사했지”

2014-05-29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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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KBS 공채 1기 홍일점 아나운서 황순덕 할머니

“120대 1 경쟁률 뚫고 입사했지”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당시 모습.

“120대 1 경쟁률 뚫고 입사했지”

KBS 공채 1기 아나운서 황순덕 할머니

올해 87세인 황순덕 할머니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한국방송공사(KBS)가 처음 실시한 아나운서 공채 1기에서 1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입사한 아나운서 출신임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신여성으로 세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던 황 할머니는 29일 찾아간 기자에게 고령임에도 여전히 똑 부러지는 정확한 발음과 맑은 목소리로 아나운서 시절 일화를 전해줬다. 나일스 요양원에 거주하는 황 할머니는 “입사 당시 경쟁률이 치열했지. 1명을 뽑는데 120명이나 몰렸어. 대부분 1차 목소리 테스트에서 탈락됐지”라며 “나는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가 있었기에 가능했어” 라고 70여년전을 회상했다. 외동딸로 태어나 동덕고등여학교에 재학 중 일제의 수탈과 괴롭힘을 피해 서울을 떠나 충남 공주로 피신해 공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매동보통학교(초등학교) 시절부터 목소리가 남달라 일본인 교사들로부터 각종 행사에 낭독 및 노래 등을 하기도 했다고. 그는 “해방후 KBS에 입사해 아나운서로 활동할 당시 일본에서 온 고위층이 해방이 됐는데도 ‘조센징’이라는 비하발언을 할 때는 너무 화가 나 멸시발언을 하지 말아달라고 강력히 요청하기도 했다”고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당시 방송국 상황은 지금과 달라 열악했다. 남자 아나운서 5~6명에 여자 아나운서는 해방전 입사한 이춘자 선배밖에 없을 때였다. 주요 프로그램은 남자 아나운서들이 맡고 여자 아나운서들은 주로 어린이와 주부들을 위한 방송을 했다. 하지만 일본 고위층이 방문해 일본어가 필요할 경우에는 가끔 일본어 방송을 하기도 했다.”.

황 할머니는 “6.25전쟁이 나니까 당시 공보처 정훈부 소속이 되어 KBS 아나운서들이 대북 방공방송을 했다. 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했을 때 대북방송을 했던 나를 잡으러 집을 급습했다. 나는 사촌 언니였던 황혜성(조선궁중요리 인간문화재) 당시 숙명여대 교수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그때 서울대에 다니던 오빠와 경동고에 다니던 남동생이 인민군에 잡혀가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다. 그들이 잡혀간게 나 때문인 것 같아 아직도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대구 피난시절 나를 알아 본 대구방송국장의 요청으로 대구방송국(현 대구 KBS)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했으며 이때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이후 아나운서를 그만두게 됐다. 지금도 TV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시절의 추억에 빠진다”고 전했다. 지난 1981년 미국으로 이민 온 황 할머니는 슬하에 2남 1녀와 8명의 손주, 증손주 3명을 두고 있으며 지난해까지 혼자 버스를 이용할 정도로 건강했지만 올해 약간의 당뇨 증세로 인한 가족들의 염려로 요양원에 입주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내내 반듯한 자세로 명확한 발음과 기품있는 어휘를 구사한 황 할머니는 KBS 공채 1기 아나운서로서의 모습과 자긍심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정규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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