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김현희 ㅣ 민폐와 염치
2013-05-28 (화) 12:00:00
유행어처럼 동시대 사람들의 속마음을 오롯이 반영하는 게 있을까? ‘된장녀’란 말에선 소비풍조를 비꼬는 문화가,‘너’와 ‘나’가 아니라 ‘갑’과 ‘을’로 규정하는 말 속엔 기득권을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의 벽이 공고해지는 서글픈 세상사가 반영되어 있다. ‘민폐’란 말도 근 몇 년 사이에 많이 쓰이는 말 중 하나가 됐다. 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뜻하는 민폐란 말의 어원은 원래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불가피하게 민간인에게 가하는 피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접하는 ‘민폐’란 말은 지하철에서 둘 셋은 앉을 수 있는 자리에 누워있는 것같이 자기만 편하자고 공공질서에 불편함을 끼치는 일부터 집단 안에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두루두루 쓰이고 있다. 전자가 고쳐야 하는 민폐라면 후자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초보운전자가 차선을 바꾸느라 주위의 운전자들에게 불편함을 끼칠 수 있다.
이럴 땐 ‘민폐’라는 말로 초보운전자를 탓할 게 아니라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양보하고 기다리는 쪽이 좋다고 본다. 누군가 우리와 다르거나 우리와 같이 보조를 맞출 수 없을 때 ‘민폐’란 말을 쓸 때는, 초점이 ‘나’와 “내 집단’의 입장에만 맞춰져 있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불편하고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민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은 ‘민폐’란 말 대신 ‘염치’라는 말을 썼다. 염치란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염치란 말 속에는 상대방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내’가 조심하는 마음에 방점이 찍혀 있다. 염치를 차리고 살 때는 남의 잘못보다는 나에 대한 반성이 앞서 있었는데 ‘민폐’란 말이 유행하는 세상에는 나의 반성보다는 남탓하는 일이 더 우선해 보인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확실해지는 것은 삶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더불어 같이 가는 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불어 같이 가기 위해서는 민폐라고 남탓을 하기보단 염치를 차리려고 노력이 더 소중한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