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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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과 노예해방

2013-01-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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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만식 기독교윤리실천 운동본부 이사

음산한 겨울비가 스쳐간 1861년 2월 11일 아침, 대통령에 재선된 아브라함 링컨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기차 정거장 광장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나의 친구들이여, 아무도 나의 이 이별의 슬픔을 달래줄 수 없는 처지에 있지만 나는 내가 자라난 이 고장과 여러분의 많은 신세를 지고 이곳을 떠납니다. (중략) 내가 워싱턴에 가서 수행해야할 일이 너무도 막중하기에 다시 돌아올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나님의 가호로 모든 것이 잘되리라 믿고 여러분의 많은 기도를 바랍니다.”
링컨 특유의 간결한 연설 내용이었다. 그의 나이 52세. 이별인사에서 재앙의 암시를 비친 대로 결국 그는 불귀의 몸이 되어 1865년 4월19일 검은 장막이 덮인 기차를 타고 고향 마을로 돌아와 긴 기적을 울렸다. 그 기적소리야 말로 인류역사의 최대과제였던 노예해방과 지리멸렬 분할 독립하려던 미국을 하나의 단일국가로 통일, 완료함을 고하는 승전고의 메아리였다.
링컨의 아버지 토마스의 원래 고향은 버지니아였다. 인디언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그는 품팔이 일꾼으로 떠돌다가 뜻이 있어 개척지인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이주를 결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1809년 첫아기 링컨이 태어 났을때 그의 모습은 다리가 유난히도 긴 기형아 같았다고 출산을 도운 산파는 술회하고 있다. 그런 그가 자라면서 맹렬한 독서광으로 변해 밭을 갈 때도 책을 끼고 있는 그를 보고 토마스는 “이 게으름뱅이 에이브”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6세때 수마일 떨어진 통나무 학교에서 몇 달 간의 기초교육을 받았던 그의 공교육은 합쳐 1년이 고작이었다고 전기 작가 캔단스 프레밍은 말하고 있다.
그가 19세가 되어 집을 나와 뉴올리언스에서 세상 처음 월급 6달러(요즘 100달러)을 받고 증기 유람선 심부름꾼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호기심으로 가본 그곳 노예시장에서 한 가족이 쇠사슬로 묶인 채 새 주인의 뒤를 따라가는 비참한 장면을 보았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귀가를 포기하고 목적지도 없이 유랑의 길을 걷다 뉴샐럼이란 곳에 도착,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게 된다. 그로서리 점원, 우체국 서기, 짧은 군대생활 그리고 잡화상 동업 등 다양한 행적을 거듭하던 25세 때에는 그때만 해도 별 볼 일없었던 주의원에 출마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눈을 뜨게 되고 법률공부를 하고 변호사가 되어 합동 변호사 사무실도 차렸다.
각종 선거에 당락의 희비를 맛본 그가 49세에 이르러 드디어 공화당 공천을 받고 대통령에 출마, 민주당의 스티브 더글러스를 꺾고 16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 정견 벽보 내용〓 이름:아브라함 링컨, 별명: 키다리 링컨, 키 큰 방랑아, 팔긴 원숭이, 나이: 49세 키: 6’4” 모습: 헌출한 키에 약간 허리가 굽고 윤기 있는 고수머리. 그 누구보다도 아침 일찍 일어나고 무쇠 빛 프록코트를 즐겨 입는다. 검은 바지는 긴 다리를 채우지 못해 큰 발목이 드러난다. 정견: 노예주의 확대를 절대 반대함.
미국의 노예문제는 실로 건국이래의 큰 숙제였다. 15대 부캐넌 대통령에 이르러 양당의 합의를 보고 각주를 노예주(Slave State)와 자유주(Free State)로 양분하여 단일 공화국 체제를 유지하되 이는 새로 선출된 대통령의 인준이 필요하다라는 단서를 붙인 법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 당선된 링컨은 “No, 미국은 하나뿐이다”라고 선언했다.
전쟁은 터지고 62만 명이란 전사자를 내는 동족상쟁의 살육전은 4년을 끌다가 1865년 남군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총성이 멎고 겨우 6일이 지난 4월14일 머리를 식히려고 연극을 보러간 링컨을 저격한 사람은 부스(Booth)라는 남부 분리 독립운동가였다.
링컨의 나이 56세. 아브라함 링컨은 신실한 크리스천이요 하늘이 보낸 구원의 메신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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