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강정은 l 엄마의 길

2011-07-18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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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한 중학교 3학년 즈음 일 것이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 지루함에 못이겨 잡생각이 들었었다. 이런 저런 나만의 망상과 가상, 환상의 세계 속에 한참 빠져있다가, 문득 내가 결혼을 한다면 이런 남자와 하겠다는 다짐이 생겨 무언가 리스트를 잔뜩 써내려 갔던 적이 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써놓고 실제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만족해 하고는 혼자 행복해 하며 잠자리 속에서도 가슴 설레하곤 했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인 나의 현실을 보면 내게 결혼은 평생 안올지도 모르는 막연한 미래같았다. 그런데 어느덧 나는 결혼이란 생소하고 두근거리는 단어에 너무나 익숙해져 살고 있다. 이젠 결혼이란 환상에서 현실은 이런거라고 나름 말해줄 수 있을 만큼 살아왔다. 내가 중학교 때 생각해 보았던 결혼과 지금은 말도 안되게 다르다. 그렇게 결혼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적응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어릴 적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는 엄마의 뒷모습에서만 보이는 오랜 건성으로 갈라진 두발 뒷꿈치를 보며 미래에 엄마될 나는 그런 내 엄마의 모습과는 틀린 더 나은 모습을 상상했었다. 화장실을 써야 하는데 더러운 걸래를 빠느라 온 화장실 바닥이 더러운 비눗물에 덮혀서 더 이상 들어가기가 싫어질 때 나는 속으로 그보다 더 우아한 나의 미래를 상상했다. 시장을 다녀오는 엄마의 바구니에는 관심을 져버리게 하는 흙 묻은 야채들과 무서운 눈을 가진 생선으로만 가득해 장보는 엄마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는 더욱 깨끗하고 풍성한 나의 미래의 시장바구니를 상상했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도 가족의 무슨 날이면 구석에서 혼자 우는 엄마를 보면서도 나는 그런 엄마보다는 더욱 당당한 나의 미래를 상상했었다. 그리고는 몇십년이 흘러 문득나의 모습을 보니 설겆이 하는 나의 모습이 누군가와 닮았고, 맨손으로 먼지 뭍은 걸래를 행구는 모습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고, 생선만 봐도 도망가던 내가 생선을 잡아 직접 손질하는 나를 보면서 옛날의 우리집 밥상이 떠올랐다.

무슨 날만 되면 혼자 바빠 어쩔 줄 몰라하다 사고 치는 나를 보며 그 때 그 흘렸던 엄마의 눈물의 사연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아무 것도 모르고 빠져 있었던 내 미래에 대한 환상이 현실과는 다르지만, 누군가가 먼저 지나갔던 길을 나도 가고 있다는 생각에 실망이 아닌 극히 정상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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