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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칼럼/ 다시 쓰는 카리스마 리더십(17)이순신 리더십

2011-04-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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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1545-98)의 466회 탄신일이다. 한 달 전 이순신의 구국 충정의 의지가 숨 쉬고 있는 한산도를 다녀왔다. 통영에서 배를 타고 하늘 빛보다 더 푸른 한산 앞 바다를 건너 한산도 포구에 내렸다. 포구에서 목적지 제승당(制勝堂)까지 가는 길가엔 쏟아지는 4월의 맑은 햇빛을 받아 동백꽃이 붉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뒷산 숲속에선 내내 뻐꾸기가 울었다. 목적지에 당도하니 한산대첩을 기념하는 제승당이 한산 바다를 향하여 정 중앙에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한산 넓은 바다를 향하여 수루(戍樓)가 우뚝 서 있었다. 수루 중앙에 큰 북이 보였고, 앞 벽에는 장군이 읊었던 시(詩)가 내 마음을 압도한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수루에서 내려다 본 한산 앞 바다는 큰 원통 모양이다. 이순신은 그 당시 당포 연안 견내량에 깊숙이 정박하고 있는 왜장 와키자카 연합 함대를 한산 앞 바다까지 유인하여 회심의 일전을 벌였다. 이순신은 왜군과 23번 싸워서 23번 다 이겼다. 한 번도 그들에게 진 적이 없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전술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리더십은 전술 리더십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산대첩에서 그가 쓴 전술은 “학익진(鶴翼陣)”이다. 그 당시 왜군 연합함대의 규모는 110척
이 넘었고 수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다. 만일 이 전쟁에서 왜군이 이기면 그들의 육군 병력과 군수 물자를 전라남도 해안을 통하여 한양과 평양까지 단숨에 수송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은 분초를 다투게 되는 상황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한산 바다에서 왜군을 초토화 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상황에서 장군은 그때까지 아무도 사용한 일이 없는 낮선 전술인 “학익진”을 파격적으로 채택했다. 유인-포위-집중타격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학익진 전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장군은 수 백 번의 훈련을 거쳐 휘하의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승전의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이순신이 탁월한 전술가라는 사실은 단 13척의 배를 가지고 130척이 넘는 왜군함대를 전멸시킨
명량대첩의 “일자진(一字陣)” 전술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1597년 9월 16일 이순신은 130척이 넘는 세키부네 휘하의 대규모 함대가 전라도 쪽을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순신은 전 함대에 출정 명령을 내렸다. 동원된 아군의 배는 13척 뿐이었다. 장군은 이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전술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고안해낸 전술이 “한 사람이 막다른 골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창안한 “일자진” 전술이다. 이순신은 막다른 골목과 같은 명량해협으로 적군을 유인하여 그곳에서 바닷물이 갑자기 역류하는 여울목 현상이 나타날 때 까지 조용히 기다렸다가 당황한 적을 일시에 괴멸 시켰다.

이처럼 이순신이 늘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한 것은 전술이었다.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막강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선 탁월한 전술의 개발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그는 믿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때그때 마다 적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신비의 전술이 창안됨으로 언제나 승리했다.

한편 그 당시 선조를 위시한 조정의 리더십은 어떠했나. 너무 빈약했다. 그들은 실제와 거리가 먼 이론가에 불과했다. 책상머리에 앉아 당파 싸움에 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밑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정확히 분석하고 판단하는 지적 능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온갖 음모와 모함이 조정을 흔들어 놓았고 류성룡과 이순신 같은 충신을 탄핵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근자에 이순신 리더십이 빈번히 회자된다. 이순신은 외유내강, 겸손, 희생정신, 애국충정, 용기, 지모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침묵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아끼고 생각을 많이 하는 위인이었다. 수루에 올라 한산 앞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그걸 느꼈다.

김창만/ 온누리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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