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는 “공감력(共感力)이 곧 리더의 힘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당연히 공감지수(EQ-Empathy Quotient)를 향상시킬 방책에 대하여 관심이 쏠릴 것이다. 그런 독자들을 위하여 이글을 쓴다.
첫째, 모험가가 되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감과 감정이입을 비숫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공감이란 단순히 감정이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공감은 동정심(sympathy)과 가끔 혼돈되기도 하나 단순한 동정심도 역시 공감과는 거리가 있다. 공감은 절망과 시련으로 몸부림치는 세상 속의 인간에 대하여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윤리적인 책임(ethical responsibility)”을 이루는 일이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윤리적 책임에 대한 모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공감을 이룰 수 없다. 삭개오를 사회적 단절에서 살려 낸 예수님의 모험을 보라. 예수님은 당시 그 자리에 모여 쑥덕거리며 비난하는 무리들을 아랑곳 하지 아니하고 가장 친근한 친구처럼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다. 세상 사람들의 상식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예수님의 공감력, 이것이 바로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참 리더의 표상(表象)이다.
둘째, 기대이상의 말을 건 내라. 또 공감은 단순히 남에게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공감을 이루려면 반듯이 기대와 희망이 넘치는 긍정적인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대와 희망이 넘치는 긍정적인 대화는 낮선 서로를 빠른 공감대 안으로 이끌어 준다.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 중 예수님의 말을 주목하여 보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삭개오를 보고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기뻐하며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그이가 죄인의 집 손님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때
삭개오가 일어나서 주님께 말했다. “주님, 보십시오.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습니다. 만일 제가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왔다.” (누가복음 19:5-10). 이게 바로 공감력이다.
셋째, 실존적 공허를 무너트려라. 실존적 공허와 내적 무의미감은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큰 적이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의 내면은 삶의 무의미감과 실존적 고통으로 멍들어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살아있는 존재와 단절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명력을 잃었다. 누구를 공감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존적 공허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사람을 살아있는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과 연결시켜줌으로서 잃어버린 생의 의미와 목표를 확고하게 심어 주는 일이다. 문학가로는 성공을 이루었지만 처절한 실존적 공허감과 무의미감으로 고통당하던
톨스토이가 하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이렇게 고백했다. “신앙이 무엇인가? 신앙은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다.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없다면 그건 전혀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신앙 때문에 다른 사람과 깊은 유대감 속에 살아야 한다는 공감의 책임을 깨달았다.”
넷째, 누군가에게 큰 원을 그려주는 친구가 되어라. 사람은 혼자서 살지 못한다.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외로워 병이 든다. 혼자라는 단절감은 절망감을 불러오고, 결국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세무관리 였던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돈을 많이 모았지만 마음이 외로운 사람이었고.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사회적 고아였다. 이런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예수님을 보라. 그분은 세상에서 단절되어 외로움을 겪는 자, 인생을 살아갈 힘이 부족하여 절망하고 낙심한 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축복 안에 넉넉히 들어올 수 있도록 큰 원을 그려놓으셨다. 당신은 리더인가. 예수님을 닮아 공감지수를 적극적으로 계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