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한인사회의 역사와 한인들(1950-1974)
2010-01-20 (수)
워싱턴 한인사회의 성장과정은 두 부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전자는 1882년 한미수교 이후 워싱턴 지역에 유학 온 학생, 혁명 독립투사들이다. 후자는 워싱턴 한인사회를 성장시킨 1950대 이후 유학 온 학생들이다. 1960년 초기에 들어서면서 한미부인회가 조직되었으며 60년 중반에 한인회와 학생회가 탄생했다. 이들의 활동은 순수한 친목단체였다.
이때 교포 인구는 약 80-90명 정도였다. 필자가 1964-1965년 뉴욕 세계무역박람회 근무를 마치면서 학업 차 워싱턴에 주거지를 옮겨 왔을 무렵은 교포, 유학생 가족 등 인구는 겨우 150명 정도였다. 당시 뉴욕에는 약 400명 정도의 한인 유학생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16가에 황재경 목사님이 이끄는 한인교회가 하나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교포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식당도 식품점도 없었으며 1968년 이후부터 교포 비즈니스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고 교포 인구도 늘어났다.
유학생으로 미국에 온 노진환 한인회장이 한국에 나가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면서부터 한인회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무되기 시작했다. 유학생 한인회장은 최제창, 노광욱, 이성호, 이하우, 고응표, 이도영 회장으로 이어졌다. 1975년부터 파워 버튼은 1970년대 중반에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투표권 행사의 균형이 바꿔진 것이다.
한인사회도 한국정치의 영향으로 친정부, 반정부 노선으로 양분된 상태가 시작됐다. 1974년 까지 교포단체는 한인회, 워싱턴 실업인협회, 한미부인회, 학생회장학회 등 4개 단체만 존재했었다. 동창회도 없었다. 워싱턴 지역 한인 인구 증가는 1970년 미국의 새 이민법이 시행되면서부터 한국에도 많은 혜택이 주어진 이유 때문이다. 1974년경에는 워싱턴 교포인구가 약 2만 명에 육박한 것이다. 당시 실업인협회에서 조사한 한인 비즈니스는 160개로 파악이 되었으며 업종은 20종이 넘었다. 헌데 1970년 전후에 먼저 생긴 것이 언론이었다. 언론들이 교포생활에 정서적인 힘이 되주었다. 한국일보 유태희 발행인, 미주한국 동아일보 발행인 유석희, 한국신보 한광년 발행인, 한국신보 홍성원 발행인, 김영호 기독교 방송, 이광재 한인방송, 이분들이 교포사회를 위해 열심히 소식을 알렸다.
워싱턴 지역 한인인구가 매해 증가하면서 양분되어 한인회 회장선거에는 한국정치가 개입 되었다. 특히 이도영 회장 대변인 김동현, 고응표 회장 대변인 황옥성 간에 자주 일어났던 입 싸움은 워싱턴 한인사회를 떠들썩하게 감정대립으로 번져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난다.
필자는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인사회 성장과정에 직접 몸담아 왔던 사람이었다. 워싱턴 한인들이 걸어온 역사를 언급하는 건 내가 보고 들은 발자취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남겨주려는 이유일 뿐이다.
고근필
전 페닌슐라 한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