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전에는 들리지 않던 초하(初夏)의 달큼한 숨소리가 새롭다. 6월의 아름다운 풍경에 덕경이의 마음은 잠시 들뜨지만 그의 몸은 정작 고개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할 정도다. 명철한 눈매에 금세 작은 시름이 깃든다.
열다섯, 버지니아 헤이마켓의 베틀필드고 9학년 김덕경. GT 클래스를 다니며 과학자가 되길 원하던 소년은 지금 병상 안에 갇혀 있다. 친구들과 말다툼 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던 착한 아이는 지긋지긋한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때론 참기 힘든 고통 때문에 살아야한다는 희망이 무디어지기도 해요.
림포마(lymphoma). 듣지도 못하던 임파선 악성 종양이 덕경이를 습격한 건 아마 지난 겨울이었다. 테니스를 치다 갑작스런 통증에 한의원을 찾았다. 근육통이라 생각해 침을 맞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이상한 건 키가 반 뼘이나 더 커버렸다. 주위에선 성장통이라 했지만 아픔은 계속됐다. 혈액검사를 받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나오지 않았다. 통증은 더 심해졌다. 학교에서도 쓰러지자 부모님은 덕경이를 척추신경 외과로 데려갔다.
이렇게 아픈 아이는 처음이라며 빨리 이머전시로 데려가래요. 희귀병으로 간주하는데 저는 믿고 싶지 않았어요.
어머니 서진화씨는 이번에는 덕경이를 정형외과로 데려갔다. 역시 진단은 빨리 응급실로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3월16일 훼어팩스 이노바 병원을 찾았다. 조직검사 끝에 희귀암의 일종인 림포마 4기로 밝혀졌다.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건강하던 제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했는지…제게 수많은 고통을 막아주시는 하느님께서 미처 막아주시지 못한 작은 돌멩이에 맞았나 봅니다. 덕경이는 힘겹게 말을 잇는다.
암 치료가 시작됐다. 방사선이나 수술이 아닌 약물치료만 가능한 병이다. 닥터 혼(Horn)을 비롯한 5명의 의사가 덕경이를 맡았다. 보름 간격으로 모두 6번의 약물 주사를 맞고 그 치료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의사들은 치료 후 2달을 지켜본 후 암의 흔적이 사라졌으면 완치된 것이라며 완치 확률은 75%라고 덕경이 가족에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 와중에 이번에는 박테리아에 감염됐다. 멀쩡한 정상세포마저 죽이는 지독한 약 효과에 면역력이 떨어진 것이다. 구토와 설사, 고열이 이어졌다. 음식물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며 힘이 없어지면서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한다. 처절한 고통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 링게르와 진통제, 혈소판, 칼로리 주사… 온 몸은 주사 바늘로 만신창이가 됐지만 덕경이는 그 아픔 중에도 정작 자신보다 아버지와 엄마를 더 걱정하고 있다. 불과 5년 전 이민 온 부모님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 서씨는 식당 웨이트리스를 그만 두고 24시간 병실을 지키고 있다. 아버지 김명훈씨는 한식당에서 파트 타임 요리사로 일하지만 혼자 벌이로는 덕경이 병 구완은 물론 다섯 식구 생계도 난감한 지경이다.
하루 입원비가 4-5천달러 나옵니다. 의료보험이 없는데 다행히 소셜 워커의 도움을 받아 치료비 걱정은 뒤로 미뤄놓았습니다. 덕경이가 그 아픈 중에도 우리 사는 형편을 걱정해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서씨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투병중인 아들의 부담을 덜어주지 못해 못내 미안할 뿐이다.
덕경이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온정도 밀려왔다. 부모님과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팔을 걷어붙였고 원주 카리따스에서는 빗속에서도 걷기대회를 열어 모금을 해주었다. 한인들의 아름다운 힘이 발휘된 것이다. 그 사실을 안 덕경이는 며칠 전에는 성당 식구들에게 힘들게 편지를 썼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배웠습니다. 제 부모님을 도와주시는 많은 분들의 사랑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찾은 신천지에서 덕경이의 몸은 감당하기 힘든 병이 들었다. 하지만 절망의 그림자가 병실을 덮어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밝고 건강하다. 과학자를 꿈꾸던 착한 소년은 이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빨리 퇴원해서 집 앞에서 마음껏 뛰어 놀았으면 좋겠어요.
<이종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