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작은 진딧물이 세계 와인 족보 바꿨다

2007-06-0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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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뿌리 갉아 죽이는 미대륙 토종 ‘필록세라’
유럽으로 침투 프랑스 등 각국 포도밭 초토화
내성 강한 미국 토종과 접붙여 겨우 살아남아
산·바다로 둘러싸인 칠레엔 침투못해 품종 보존

16세기 초 스페인은 화려했던 멕시코의 아즈텍 왕국을 초토화 시켰다. 여세를 몰아 잉카 제국도 발아래 무릎을 꿇렸다. 대서양과 태평양 가운데 떠있던 미지의 대륙이 일순간에 유럽 제국의 창과 칼끝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어 북쪽의 거대한 땅덩어리 미국의 인디언들도 식민지를 꿈꾸던 영국에 의해 수없이 살상됐다. 컬럼버스의 역사적 신대륙 발견 이후 맺어졌던 미국과 유럽의 인연은 이렇게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수십만의 정예병을 거느린 아즈텍이나 잉카, 그리고 용감무쌍한 미국 인디언들이 유럽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멸망의 길을 걸었을까. 역사가들은 그리 보지 않는다. 신비스럽기만 했던 신대륙은 유럽인들을 따라 들어온 천연두(마마)라는 작은 바이러스에 의해 스르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유럽의 바이러스가 내성이 없는 원주민들에게 급속히 퍼져나가며 전투 불능, 항거 불능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로부터 수세기 후 신대륙은 앙갚음의 기회를 갖고 만다. 유럽인들의 최고 기호품이자 음식이었던 포도밭을 초토화 시킨 것이다.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진딧물 종류의 작은 미생물을 이용해서…. 천연두에 의한 문명의 멸망을 필록세라로 복수를 한 셈이다.



▲ 필록세라
따분한 역사공부 하자는 것이 아니다. 와인을 마시다가 필록세라라는 말이 튀어 나올 때 “그게 뭔데”라고 두리번거리면 자칫 ‘바보’소리 듣는다. 필록세라가 세계 와인 족보를 몽땅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필록세라는 육안으로 식별될까 말까 할 정도로 작은 진딧물의 일종이다. 로키산맥 인근에만 살고 있던 미대륙 토종 벌레다. 포도나무 뿌리에 붙어 갉아 먹고 사는데 내성이 없는 포도나무는 그만 시름시름 앓다가 말라 죽고 만다. 그래서 포도나무뿌리 벌레라고도 불린다.
유럽인들은 대륙 동쪽에 널려 있는 토종 포도나무로 와인을 만들었지만 냄새가 나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포도나무를 들여와 포도를 심고 멀리 캘리포니아까지 진출해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필록세라에 내성이 없었던 유럽종 포도나무들이 오래 견딜 리가 없었다. 픽픽 쓰러져 죽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유럽으로 침투해 들어간 필록세라는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보르도를 시작으로 20년간 유럽대륙을 휩쓸며 유럽 토종 포도나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와인 생산에 대란이 온 것이다.
생산량은 줄어들고 와인은 없고 농가는 파산하고 난리가 난다. 유럽을 피해 호주, 사우스아프리카 등지로 옮겨가는 유럽인들을 따라 필록세라는 전세계로 퍼져나간다. 유럽종 포도나무의 멸종이 눈앞으로 다가서는 순간이다.
유럽에서는 건포도를 들여와 물을 섞고 갈아 와인을 만드는가 하면 품종을 마구 섞어 되는대로 와인을 만들었다. 와인 값은 급등했고 품질은 곤두박질 쳤다. 원산지를 속여 파는 가짜 명품 와인도 탄생한다. 프랑스 정부는 현상금까지 내걸며 필록세라 박멸에 나서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프랑스의 원산지 명칭 규정(AOV)이다.

▲유럽과 미국 토종 포도나무의 접목
세계는 해답을 찾기에 이른다. 필록세라에 내성이 강한 미국 토종 포도나무 뿌리에 유럽 종을 접붙이는 방법이다. 다행히 원래 유럽 포도의 맛과 향은 그대로 품고 있다. 지금 우리가 마시는 와인은 수천년간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포도나무의 것이 아니다. 유럽과 미국의 포도나무들이 합의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하지만 미국종이라고 필록세라를 모두 물리치는 것은 아니다. 내성이 강한 것 뿐이다. 그러니 필록세라는 아직도 포도나무를 공격하는 최고의 난적으로 세계 와인계를 벌벌 떨게 만들 수밖에 없다.

▲칠레
필록세라 공격의 무풍지대가 있다. 칠레다. 세계에서 제일 긴 나라 칠레는 동쪽으로는 태평양, 서쪽으로는 안데스 산맥, 북쪽은 사막, 그리고 남쪽은 동토. 포도나무 입장에서는 감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니 필록세라가 침투할 길은 아무데도 없었다. 칠레에는 이미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가져온 유럽의 포도 품종들이 씩씩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니 칠레는 수천년 이어져 내려오는 ‘오리지널’ 유럽 와인 품종들이 줄줄이 보존된 천연의 요새나 다름없다.
칠레에는 재미있는 품종의 유럽 포도나무가 전해진다. 필록세라 대란 이전인 1850년대에 칠레로 건너온 카르메네르(Carmenere)가 그것이다.
카르메네르는 카버네 쇼비뇽, 멀로, 프티트 베르도, 카버네 프랑 등과 함께 프랑스 보르도의 적포도주 재료 중 하나다. 맛이 부드럽고 향이 좋아 멀로로 착각할 정도다.
그런데 이 카르메네르는 유럽에서는 필록세라 이후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데다가 기르기가 힘들어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닌 품종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칠레에서는 달랐다. 칠레로 들어와 자리를 잡으며 지역 와인으로 사랑을 받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멀로로 착각되면서 말이다. 가격도 비싸지 않다. 10달러 미만으로 맛있는 카르메네르를 즐길 수 있다.


<김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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