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5전6기 끝 영주권 취득 권태경씨의 인생 드라마

2007-05-10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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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13일 워싱턴 지역 한인사 출판 기념회장을 찾은 인사들 중에는 권태경씨도 있었다. 올해 여든 일곱. 메릴랜드 랜함에 거주하는 초로(初老)의 권씨는 누구보다도 감회 깊은 표정이었다. 이 책에는 그가 다섯 번이나 추방 명령을 받고 결국 영주권을 따낸 눈물겨운 사연이 들어 있었다. 6.25 전쟁 중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그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경찰로 복무하다 경호요원으로 선발됐다. 굴곡 많은 현대사는 그를 온전히 놓아두지 않았다. 1.21 사태를 겪고 70년대 중반 뉴욕에서 특수 임무를 수행하던 중 미 정착을 결심했다. 그리고 시련은 시작됐다.

특수요원으로 워싱턴, 뉴욕 근무
귀국 날짜를 통보받았다. 1976년 10월17일이었다. 명에 따른 귀국이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느냐 하는 고민이 권태경씨를 짓눌렀다. 당시 그는 유엔대표부의 경찰 파견관이었다. 73년부터 노르웨이, 워싱턴을 거치며 해외 물을 먹은 지 벌써 3년. 그의 고민은 여기서 비롯됐다.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14년을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유신 이후 한국은 너무 달라져 있었어요. 육영수 여사도 죽고… 막상 귀국해도 큰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외국 물을 먹은 나한테 좋은 보직을 줄 리도 없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이곳 교포들이 사는 걸 보고 정착을 결심했습니다.”
사표를 내고 그가 향한 신천지는 워싱턴이었다. 권씨의 잔류는 그러나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닥쳤다. 체류 신분 문제였다. 변호사들이나 이민 브로커들은 “금방 노동허가가 나올 테니 걱정말라”고 했지만 신청하면 계속 거절당했다.
문제는 그가 소지한 관용여권이었다. 그중에서도 특수요원용이란 사실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일부에서는 망명 신청을 권했다. 그러나 부인과 4남매를 한국에 두고 혼자 살자고 망명이란 방법을 택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박 정권에 충성하던 사람이 망명할 명분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이민국으로부터 5번이나 추방명령서가 전달됐다. 그는 미국을 떠나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세요.”

혁명에 휩쓸린 맨발의 청춘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가 좌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잡초같은 그의 끈질긴 삶의 경험이 있어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권태경씨는 1938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대동아전쟁이 극성을 부리자 어머니와 5남매이던 그의 가족은 45년 할아버지가 군수로 있던 경북 상주로 피난을 왔다. 평화는 잠깐이었다. 6.25 전쟁은 그의 가족을 해체시켰다. 위로 형 2명은 전사했고 동생 둘은 피난가다 폭격에 놀라 죽었다. 53년 열여섯 나이에 홀로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중고를 다녔다. 그야말로 맨발의 청춘이었다.
“신문팔이, 구두닦이 안 해본 게 없습니다. 그러나 공부는 뒷전이고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주먹 쓰고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손에는 붕대가 벗겨지는 날이 없었고 맨날 병원, 경찰서 신세지고 살았지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건달생활을 하던 중 4.19혁명이 일어났다. 새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선봉에 서는 이들에겐 특혜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도 데모대에 휩쓸려 다니며 혁명의 소용돌이에 몸을 담궜다. 그러나 ‘혁명 청년’의 꿈은 5.16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불량배 소탕작전이 시작됐다. 잡히면 거제 수용소 행이었다. 한동안 숨어 지내던 권태경은 도피처를 찾았다. 1961년 6월 해군에 자원입대한 것이다.
3개월 훈련 후 진해 대통령 별장을 지키는 경호병 모집에 응모한 게 덜컥 붙었다. 태권도 공인 6단에 불량배 서너명쯤은 단숨에 해치우는 그의 주먹이 인정받은 것이었다.
64년 제대 후 그는 서울경찰 30기로 경찰관 신분으로 변신했다. 이듬해 6.3 데모 진압에 투입됐고 얼마뒤 그는 당시 양찬우 내무장관 경호관을 거쳐 채원식 치안국장 경호관으로 발탁됐다.

1.21 사태, 김신조와 만나다
68년 1월21일 저녁.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청와대 바로 근처까지 진출, 종로경찰서장까지 사살했다. 폭탄 소리마저 들렸지만 상대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채 치안국장을 수행, 청와대 정문 옆에 있던 그는 목숨을 걸고 교전 현장으로 다가갔다.
“채 국장이 한명만 생포하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자 바로 종로서에 지원사격을 부탁하고 교전장으로 접근해갔습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습니다. 권총과 소총 한 자루에 의지해서 당도하니 이미 몇 사람은 죽었고 군복 외투를 입고 부상당한 군인 한명을 발견했습니다. 공비란 생각이 들어 발목을 잡고 끌어내 종로경찰서 백차에 싣고 을지로에 있던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로 데려갔습니다.”
심문을 통해 그가 북한 124군 부대 소속이며 31명이 침투했고 목적은 청와대 폭파임이 드러났다. 비로소 신원과 목적이 밝혀진 것이다. 그가 생포했던 김춘식은 무장해제 도중 옷깃에 여며둔 수류탄이 터져 폭사했다.
그는 이어 채 국장을 수행, 홍제동 파출소에 끌려온 자수병 심문했다. 그가 김신조였다. 권태경은 이 공훈으로 일계급 특진, 경사로 진급했다. 그후 청량리 파출소장, 기동순찰대 반장을 거쳐 청와대 경호실 파견 근무를 했다.
“얼마나 교만했던지 세상에 무서울 게 없던 시절이었어요. 북악산 호랑이도 잡을 수 있다는 용맹이 저의 힘이었고 제 능력으로 사는 날들이었지요.”

전두환과의 인연
10월 유신이 단행되면서 그는 73년 노르웨이에 파견됐다. 반 유신 운동이 거세지자 해외동포 신병 안전요원으로 내보낸 것이었다. 백야(白夜)에 음식, 언어, 문화, 모든 게 맞지 않는데다 가족도 없이 홀몸으로 가 있었다. 이 ‘사지’를 벗어날 길을 궁리하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국정감사차 찾은 백두진 국회의장에 부탁해 74년 7월 미 워싱턴으로 근무지가 바뀔 수 있었다. 그 후 뉴욕으로 전근됐고 귀국 명령을 받은 것이었다.
미국에 정착하며 추방명령서를 받은 권태경은 식당일에 온갖 궂은일을 하며 영주권을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는 중에도 메릴랜드 제일감리교회에서 정준영 집사를 만나 워싱턴 청소년 센터(뒤에 YMCA로 변신) 창립에 힘을 보탰다. 80년 강철은 회장 당시 워싱턴한인회에서 사무차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난생 처음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며 그 모진 세월을 이겨냈다.
“귀가해 집 주변에 낯선 사람이 눈에 뜨이면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차 안에서 잠도 자고 직장에서도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가슴을 졸이고 불안과 초조 속에 시달렸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그러는 사이 1981년이 됐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 일정이 잡히면서 워싱턴한인사회에서는 환영위원회 구성을 놓고 소란이 일어났다. 많은 이들이 광주학살의 주인공이라며 전 대통령의 환영을 반대했다.
“박연수 총영사로부터 장선근씨와 함께 환영위에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했던 제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난감했습니다. 부총무를 맡아 경호업무를 담당했는데 살인마 전두환을 돕는다고 온갖 공갈,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어찌됐든 전두환은 그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앤드류스 공항에서 출국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불법체류자다. 그러면서 대통령에 특별 사면권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전 대통령 내외에 편지를 썼다. “지금 오도 가도 못하고 망명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대통령께서 살려주십시오.”
그는 편지를 알고 지내던 후배 경호원에서 주며 꼭 대통령께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경호원은 비행기가 알래스카 공항에 중간 기착할 때 전 대통령에게 그 편지를 전달했다 한다. 얼마 뒤 치안본부로부터 편지가 왔다. 권씨의 청원서를 접수했고 미 대사관에서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7월26일 캐나다 토론토의 미 대사관에 가서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된 겁니다.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토록 한이 맺혔던 영주권에 이어 알마 뒤에는 시민권도 땄다. 서울에서 가족들을 초청했다. 현재는 아이들 5남매와 손자 2명, 손녀 8명에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미국 철조망 제작회사에서 12년을 근무한 그는 90년 메릴랜드 랜험에 피시 마켓 문을 열었다. 메릴랜드 제일장로교회 집사로 하나님께 지난 잘못을 늘 회개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남다른 인생역정을 겪은 권태경씨는 “저처럼 이민으로 인해 시련을 겪는 사람들이 용기를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며 “절망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만 붙들고 있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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