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수 전 6군단장 회고록 ‘송화강에서 포토맥까지’ 펴내
2007-05-04 (금) 12:00:00
2007년 4월7일.
벚꽃 만발한 서울의
콘티넨탈 호텔에는 백발 성성한 노(老) 장군들이 대거 모여 들었다. 백선엽, 정래혁, 강영훈, 유재흥 등등 국군을 창건한 노장들은 무대에 오른 한 동료의 굴곡 많았던, 그러나 원칙을 지켜온 정의로운 삶을 떠올리며 따뜻한 헌사를 바쳤다.
이날 주인공은 회고록 ‘송화강에서 포토맥 강까지’를 출간한 예비역 육군소장 김웅수 (金雄洙, 84) 박사였다.
김 박사는 인사말을 통해 “회고록을 쓰게 된 것은 내 활동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식들을 위해 부부의 활동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겸허함으로 감춘 그의 삶의 의미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이 회고록의 페이지, 페이지마다에는 참 군인이 걸어온 길과 고뇌, 한국군의 거친 숨결이 담겨 있다. 또 5.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다 체포돼 미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한 군인의 기록과 학자로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며 스스로 박정희와 역사적 대결을 벌여온 한 풍운아의 꿋꿋한 인생 드라마가 펼쳐져 있다.
1923년 외가인 경북 김천 지례에서 태어난 김박사는 1927년, 항일운동을 하던 가족들을 따라 만주 벌판의 독립군 부락으로 터전을 옮겼다.
1944년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간 그는 이듬해 일본 센다이 육군 예비 사관학교를 졸업하며 군문에 들었다.
해방 후 육사 생도대장을 거쳐 제1야전군 창설을 위한 사령관 대리 겸 참모장을 지낸 그는 6.25 동란이 발발하자 2사단장으로 공산세력을 막아냈다.
전후 육군 작전국장을 지낸 그는 6군단장으로 재임중 박정희와 현대사를 가르는 운명의 승부를 벌인다.
사실 그는 1957-8년 육군의 군수 참모부장으로 재임중 창설한 군수사령부 초대 사령관에 박정희를 추천한 당사자였다.
그는 취임식을 위해 부산을 함께 찾은 박정희로부터 쿠데타 제의를 받는다.
“오후 내방한 박 장군은 나에게 느닷없이 ‘각하! 혁명이라도 해야지 이대로 나라가 되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 박 장군과는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6군단장 재임중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 소식을 들은 그는 처음 공산 박의 전력 때문에 혁명이 아닌가 의심했다.
“우리는 박정희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선 공산혁명이 아닌가를 의심 아니 할 수 없었다. 내가 해야할 일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나는 국가 전복세력과 서울을 향한 공산군의 진격로 사이에서 원칙과 편법, 합법과 불법, 쿠데타 군에 가담된 부하 장병들의 장래 그리고 국가에 대한 나의 책임과 나의 장래에 대해 고민을 하였다.”
그는 전 군단에 비상명령을 내렸고 예하 8사단은 쿠데타 진압을 위해 출동했다.
그러나 흔들리던 상부의 지휘체계로 인해 진압에 실패하고 결국 쿠데타 세력에 체포됐다. 반혁명혐의로 수감된 그는 복역중 이듬해 자의반 타의반 도미하게 됐다.
5.16은 그에게 아직도 생생한 기억을 되새겨 주는 현실이자 원죄 같은 것이다.
“나는 5.16으로 인해 정치인뿐 아니라 많은 학자 종교인 학생 노동자들의 희생과 고생 앞에 군사 쿠데타를 방지 못한 군의 고급 지휘관의 한사람으로서 항상 죄의식을 느끼고 살아왔다.”
괌과 하와이를 경유, 24시간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그저 1년만 체류하면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둔한 역사와 시간은 그를 속였다. 준(準) 망명객 신분으로 발을 들여놓은 후 45년. 그는 여전히 미국을 떠나지 못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어깨 위의 별을 스스로 떼내고 학업을 택했다.
“미국에 오면서 나의 생활 태도에 대해 생각한 바 있었다. 그 하나는 내가 군문을 떠나게 되고 옥고까지 치룬 원한에 대한 보복심을 버리고 대신 자기 변신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나의 마음도 가벼워지며 겸허함을 유지하며 자기 개선의 노력을 할 수 있는 덕을 보았다.”
그것은 믿음이 있어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현재도 김박사는 와싱톤한인교회 장로로 봉직하며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수만 명을 지휘하던 장군에서 학생 신분으로 변한 그는 시애틀의 워싱턴대에서 경제학 학사, 석사를 마치고 72년에는 워싱턴 D.C.의 카톨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초인적인 노력이었다. 부인은 재봉일부터 시작, 병리학 연구실에서 일하며 가정의 경제와 남편의 성취를 도왔다.
그는 72년부터 카톨릭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93년 은퇴했다.
물론 그 사이 박 정권은 갖은 회유로 그를 유혹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1972년 유신독재가 선포되자 그는 워싱턴에서 국내외를 들어 첫 반대 시위를 지휘하며 박정희의 눈엣 가시 같은 존재가 됐다.
김 박사는 지금도 5.16과 유신독재가 뿌려놓은 악의 유산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5.16이 심어논 사회적 부조리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아니하는 수법과 IMF사태를 초래케 한 재벌적 경제제도와 지역주의도 군사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의 소산과 무관치 아니할 것이다. 독재 군사 정권 유지를 위한 수많은 인명의 희생이 우리가 근대화를 위해 필수적이었나 반문이 된다.”
은퇴 후 고향인 논산 건양대에서 잠시 후학들을 지도한 그는 워싱턴 동포사회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국제 한국학회를 이끌었고 한미 장학재단 창설에 앞장서 한인 2세들에 장학금 혜택을 주고 있다.
군인의 본분을 다했고 한 인간으로서 꼿꼿한 풍모를 잃지 않고 스스로에게 충실했던 그는 후학들에 이렇게 강조한다.
“원칙과 정도를 걷는다는 것은 힘들고 단기적으로는 외로운 길이겠으나 긴 눈으로는 외롭지 아니한 길이다. 그것은 정도를 걷고 있는 대중에게 소망과 인내를 주며 자기 인생에게는 고귀한 자위가 된다. 권력은 우리의 현 생활을 좌우시키지만 세상은 외로우나 정도를 걷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종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