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학부모 칼럼 사립학교 <1>: 얼마나 공부해야 하나?

2007-01-29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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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공부를 오전에 모두 마쳐
오후에는 스포츠·과외활동 등

한국의 온돌방만큼이나 좋은 것은 미국의 벽난로라고 할까. 미국에서 처음 맞는 겨울이었지만 완전히 흰 눈으로 덮여 있는 겨울에 활활 타오르는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멀리 두고 온 고향도 잠시 잊고 있었다. 때는 1967년 겨울, 뉴욕주 북쪽 시골 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립학교의 기숙사 로비에서 있던 일이다. 첫 여름은 오하이오주에서 보냈고 가을부터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날은 한 학생이 엉뚱하게 장작을 내 앞에 놓고 반으로 잘라달라는 것이다. 왜 나한테 야단인가 하면서 두리번거렸더니 왜 그냥 손으로나 발길로 한방에 잘라주지 무엇을 두리번거리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다른 친구한테서 들어서 영문을 알게 되었지만 내가 오기 바로 전해까지 한국에서 온 학생이 둘이 있었는데 한 명은 바이얼린을 잘 켜고 합창도 잘했고 다른 한 학생은 태권도를 아주 잘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체격이 아주 큰 한 백인 학생이 체격이 작은 태권도 까만 띠에게 자꾸 수작을 걸어왔다고 한다. 자꾸 와서 귀찮게 하니까 처음엔 말로 조심하라고 수차례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재미있는 듯 못살게 구니까 그 자리에서 정면으로 급소를 한방 때려주었다고 한다. 그것을 목격했던 한 아이가 그 장면을 나에게 얘기해 주었는데 몇 년이 지났었는데도 사뭇 흥분이 되는지 아주 긴장된 모습으로 얘기를 해주었다. 보통 세게 맞으면 뒤로 나자빠지는 것이 상식인데 얘는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주먹이 나른 것도 눈 깜짝할 사이였고 200파운드가 넘는 거구가 그대로 앞으로 폭삭 쓰러지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는 그 학생은 다른 한국 학생까지도 혹 보복을 받을까 봐 한국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남자는 다 태권도를 잘한다고 한 마디 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건 이후로 한국 학생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소문이 쫙 퍼졌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날 나에게 나무를 쪼개 달라고 했던 것도 그 태권도 잘하는 학생이 가끔 벽난로에 장작을 넣으면서 너무 큰 나무는 손이나 발로 ‘격파’해서 넣는 것을 보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장작을 맨손으로 쪼개 달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넘어갔지만 그 음악에 소질이 있었던 선배 때문에 받은 피해는 더 오래 갔었던 것이, 그 학교 음악선생이 한국 학생이 또 온다는 소리를 듣고 한국 아이는 다 음악을 잘하는 줄 착각하고 나를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에 미리 넣어 놓았던 것이다. 너 무슨 악기를 하냐는 질문에 한 때 밴드 반에서 트럼펫을 만져보았던 것만 가지고 “트럼펫”이라고 잘못 대답했던 것 때문에 2년간이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서 전혀 음치였었던 필자가 늦게나마 음악에 조금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 때 생각만하면 웃음이 나오는 것은 전혀 깨진 소리만 내는 나를 자기가 좋다고 강제로 입단시켜 놓았었기 때문에 쫓아내지도 못하고 2년을 견디어 준 지휘자 생각 때문이다. 그 만큼 거기서 만난 첫 미국인들은 소박하고 순진했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보다 더 큰 문제는 의사소통이었다. 아무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동아사전이 세권이나 달도록 손에 달고 다녔었고 발음을 못 알아들어서 사전마저도 찾을 수 없을 때는 완전히 눈치만으로 버텼으며 그것도 안 통할 때는 그냥 웃어서 넘어갔었던 적도 많았다. 그래도 몇 달이 지나니까 간단한 일상회화는 통하게 되었지만 학교 공부는 한국처럼 교과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책, 저 책 숙제를 내주어 읽고 토론을 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이라 전혀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립학교라 방과 후에 한 시간씩 따로 개인교사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학교는 사립이었지만 소위 말하는 ‘대학준비’학교(college preparatory school)와는 성격이 달랐다. 프렙 스쿨은 보다 전통적이고 Ivy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반면에, 이 학교는 극단적으로 아방가르드였고 각자 가진 재능을 맘껏 발휘하게 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다. 시설이나 선생님들의 수준은 의외로 높아서 몇 천에이커가 넘는 대지에 학생수가 100명밖에 안됐지만 선생님은 20명이나 있었고 넓은 자연 속에서 숙식부담 없이 살 수 있어서 수준이 높은 선생님들도 많이 갖추고 있었다.
이런 학교에서 수업시간은 얼마나 될까? 수업은 아침에 두 시간하고 전교생과 스태프들이 다 참여하는 조회시간(assembly)이 있었는데 그 때 모든 공지사항과 음악 발표 등 특별 행사가 있었고 우유와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후에 점심시간까지 수업이 있었고 점심식사 후에는 학생 전체가 스포츠와 작업시간에 참여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6시쯤 저녁식사가 있었고 모든 과외활동은 9시반까지 마쳐야 했었으며 10시에는 취침시간이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공부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제도적으로 수업도 점심시간 전 뿐이고, 오후는 운동, 작업, 과외활동이니까 수업을 위해서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4시간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리그에 있는 다른 학교와의 시합으로 멀리 여행도 다니고 일요일에는 교회, 그리고 정서생활과 취미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 학교가 특별히 아방가르드여서가 아니고 나중에 가게 된 보다 전통적인 기숙사 학교에서도 이 부분은 마찬가지였다. 그 대신 낮에는 운동장에서, 아니면 산에서, 들에서, 강에서 마음껏 젊음을 발산했고 지금도 생각해 볼 때 나의 평생 가장 행복했던 2년이었다고 회상하며 그런 학교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기숙사 학교들은 이런 적은 수업시간을 가지고도 어떻게 공부에도 뒤지지 않고 건강하고 튼튼한 학생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향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실제 겪은 것을 바탕으로 기숙사 학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나누어보고자 한다.

황석근 목사 <마라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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