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준(재미과학기술자협회 새크라멘토지부 회장)
무슨 까닭인지 내가 사는 곳은 한국말로 사고하고 한국적으로 사는 내가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다른 겉모양과 사고방식 등이 이제는 의식의 표면에서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내가 이곳에 산 지도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간간이 아! 나는 여기 사는 한국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떠날 수 없다.
사회는 꼭 몸과 같은 유기체이다. 건강한 몸이 개인의 삶에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은 누가나 다 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의 건강도 꼭 그만큼 중요할 것이다. 몸의 건강은 신체 한 부분 부분이 모두 건강할 때 이루어지듯 사회의 건강도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건강하게 살아갈 때 절로 유지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 사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것인지는 단지 조금의 짬을 내어 멈추어 서면 그 답이 자연스레 보인다. 오묘한 이치도 묘약도 아닌 아주 단순하고 자명한 일들인데 왜 그렇게 살아지지는 않는 것일까? 늘 바쁜 생활 속에서 시간에 쫓기며 사는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새해는 오늘 새벽을 맞듯이
살아보면 어떨까?
새벽을 여는 것과 한 해를 여는 것은 닮은 점이 있다. 여명 속에서 물끄러미 어둠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서면 짧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어떻게 살면 이렇게 바싹거리는 공기를 깊이 들이쉬며 조금은 서늘한 바람 속에 서서 잠시 느끼는 삶을 의식할 수 있을까?
명심보감이나 소학을 한가로이 뒤적이며 말을 아껴라, 언제나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라, 좋은 벗을 사귀어라, 열심히 배우고 익히라는 그 간단한, 이미 오랜 시간을 내려온 대답들을 되새겨 보면 될까?
아니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는 어떤 미국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새겨 보면 될까? 유치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거기서, 다 배웠다고 했을까?
아마 “Say, please”, “Clean up after you play, please.”, “Be good.”, “Be kind.”, “Stand in a line.”등 누구나 다 짐작이 되는 말들이 아닌가 싶다. 난 곳과 사는 곳이 다르지만 다 같이 사람들이 사는 곳은 그 근간이 같다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다.
새벽처럼 새해를 맞으며 몇몇가지 해 보고 싶은 것들을 떠올려 본다. 말은 참 신기한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얼어붙게도 또 녹일 수도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이 이 말에 이렇게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새해에는 말을 아껴보리라. (Say please.) 얼굴은 삶의 기록이다. 생각과 살아온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곳이다. 올해는 늘 부드러운 얼굴을 하려 애써 보리라. 이를 잊어버리는 시간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애써 생각하며 부드러운 얼굴로 살아보리라. (Be good). 좋은 사람들과 만나고 삶을 나누리라. 일부러 나서지는 못하겠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벗인 양 대하면 살아보리라. 훨씬 풍요로운 삶이 되지 않을까? (Be kind).
열심히 사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아름답기조차 하다. 올해는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해 다시 배우고 익히리라. 그리하여 가끔씩은 그리 살며 그 맛을 음미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