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부보다 먼저 친해져라

2006-06-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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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품종 외우는 등
이론적으로만
알려한다면 ‘도루묵’

마셔보고… 가보고…
직접 경험한것보다
더 큰 공부·스승 없어

“프랑스 와인은 이름이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아무리 공부해도 알 수가 있어야지, 지도를 놓고 수많은 지명 이름들을 배웠는데 도저히 외워지지 않아서 포기했어요.”
며칠전 이런 넋두리를 들었다. 한국사람들은 와인을 마시지 않고 공부하려 한다. 와인을 공부부터 하는 한, 학창시절 시험공부할 때 외웠던 것들이 시험 끝나자마자 머릿속에서 뿅 사라져 버렸던 것처럼 결코 와인을 잘 알게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잘 모르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의 신상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들어도 곧 잊어버리듯이, 와인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공부만 하려고 하면 그 내용들이 주먹 속의 모래알처럼 술술 빠져나가고 만다.
와인에 대해 쉽게 해박해질 수 있는 딱 한가지 방법은 와인을 좋아하는 것이다. 누구든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궁금한 것이 많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작은 부분까지 기억하게 되듯이, 와인을 좋아하게 되면 저절로 궁금해지고 그러면서 알게된 내용은 잊혀지지 않는다.
작년과 올해 두 번에 걸쳐 나와 함께 나파 밸리에 다녀온 친구들과 얼마전 와인 샵에 들른 적이 있는데 여기저기서 반색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 이거 봐. 우리가 다녀온 와이너리 거잖아!” 아는 와인의 레이블을 보는 순간 자신이 직접 가본 와이너리의 풍경과 테이스팅 룸에서 마셔보았던 와인 맛, 즐거웠던 추억까지 함께 생각나기 때문에 다른 와인들보다 훨씬 더 친하고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는 와인이 된다.
공부할 필요? 전혀 없다.
자기가 마셔보고, 자기가 가보고, 자기가 경험해본 것 이상 훌륭한 스승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와인을 공부하지 말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와인에 대해 잘 알고 마시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와인은 아는 만큼 맛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부하는 동기가 와인을 좋아해서라기보다 남들과 이야기할 때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면 금방 밑천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
내 얘기를 해서 좀 그렇지만 나는 처음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여 거의 5년이란 세월이 지날 때까지 와인에 대해서는 쩜도 모르고 그냥 마시기만 했다. 얼마나 맛있던지 왜 그렇게 좋은지, 사실은 술이 무척 약한 편인데도 그냥 매일 저녁 한두잔씩 감탄을 하며 마셨다.
그러다가 와인 좋아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많아지면서 다양한 종류를 마셔보고 평소 궁금했던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고 이해하면서 더 친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들은 거의 다 내가 마셔본 와인, 내가 방문해본 와이너리,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이 쌓이고 쌓인 것이다.
요즘에야 때때로 공부를 하지만 그것은 이 칼럼을 쓰기 위한 필수과정이다. 좋아서 마실 때는 대충 알아도 별 상관이 없는데, 글로 써야할 때는 무엇이든 정확하게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미주 한인들보다 와인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매우 좋아들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동안 살펴본 이 사람들의 특징은 이론만 빠삭하지, 실전에 약하다는 것이다. 와인을 많이 마셔보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고는 말로 마시는 사람이 많다.
특히 이런 사람 치고 프랑스 부르고뉴 산 최고급 와인 ‘로마네 콩티’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 와인이 화제로 떠오를 때면 꼭 이 로마네 콩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얼마나 비싼지,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지에 관해 서로 알고 있는 바를 열심히 이야기하는데, 나는 이제껏 그런 이야기를 꺼낸 사람 중에 실제로 로마네 콩티를 마셔봤다는 사람은 딱 한사람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나 자신도 한 병에 수천달러씩 하는 그 와인은 그림의 떡일 뿐 내 생전에 마셔볼 기회가 있을지, 기대도 하지 않고 있다.
생전에 내 돈주고 한병 사거나 한 잔 마셔볼 수도 없는 비싼 와인에 대해 맨날 얘기만 하는 것보다는 지금 내가 살 수 있는 와인을 사다가 한모금 한모금 즐기면서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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