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교사체벌 항의했더니 ‘공짜 밥 먹는 탈북자’ 말들어
’한국국적’ 첫 美망명 허용된 서재석씨
정착금 주는 건 고맙지만 계속 감시받아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멸시 받는 탈북자와 북에 남은 가족에게 자유는 언제쯤 올까요.”
오랜만에 웃음을 찾았지만 속은 편치 않다. 2004년 10월 발효한 미국의 북한인권법에 따라 망명이 허용된 첫 탈북자 서재석(39)씨는 30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착잡한 마음부터 털어놓았다.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긴 탈북 과정부터 한국 국적이 있었지만 미국 망명을 택한 사연까지 할 말이 많다”고 했다.
북한군 장교(중위)로 복무하던 그는 1996년 부대내 폭발사고로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제대했다. 살길이 막막했다. 이듬해 좌절을 딛고 세 살배기 아들 긍진이를 싸매고 무작정 국경을 넘어 중국에 갔다. 그러나 자유는 없었다. 단속을 피해 대륙을 가로질러 베트남에 도착했다.
우여곡절끝에 하노이의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을 찾았지만 “경찰을 부르겠다”는 엄포만 들었다. 기가 막혔다. 캄보디아를 거쳐 라오스까지 흘러 들어갔다. 다행히 라오스 교민 등의 도움으로 태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유엔고등판무관실(UNHCR)의 중재로 98년 8월 한국에 왔다.
그러나 남쪽 땅에도 ‘완전한 자유’는 없었다. 그는 “한국정부는 정착금 몇 푼 쥐어주고 생색을 내고 개인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감시와 참견으로 괴롭혔다”고 말했다. 탈북자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한국 국민이 아니었다. 탈북자를 ‘2등 국민’으로 여기는 주위의 편견이 늘 가슴 아팠다.
2000년 마음을 다잡고 같은 처지의 탈북자 여성과 결혼해 딸 윤미(5)도 낳았다. 하지만 아들이 학교에서조차 당하는 차별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는 “교사가 아이를 때리고 준비물을 버렸다고 해서 항의했더니 ‘북에서 와 공짜 밥 먹는 주제에…’란 말이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그는 2003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입국한 뒤 바로 망명을 신청했다.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수많은 분들이 도와줬고 무엇보다 이곳엔 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그는 현재 식구들과 함께 LA한인타운에 살고 있다.
“이번 판례가 탈북자에게 힘이 되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정부가) 정착금을 주는 건 고맙죠.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건 인간답게 살 권리에요. 부디 탈북자도 진정한 한국 국민으로 여겨주세요.” 그는 인터뷰 내내 행여 다른 감시를 받지는 않나 조심스러웠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한국일보 LA 미주본사=이의헌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