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 동지 찾기 나선 북파공작원 출신 L씨
2006-04-03 (월) 12:00:00
“HID 북파공작 설악개발단 출신을 찾음”
얼마 전부터 작은 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수소문해보니 버지니아 훼어팩스에 거주하는 L씨(59세)다. 그 자신 3년간 사선을 넘나들었던 북파요원 출신이었다. 그를 어렵게 만나 HID 시절의 기억과 옛 동지들을 찾아나선 사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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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1년 동안 7-8회 휴전선을 넘었습니다. 실탄과 폭약, 수류탄을 휴대한 채 북한 군사시설을 폭파하기도 했지요. 운이 좋아 아직 살아 있는 것같습니다.”
1968년 7월 L씨는 이른바 HID(당시 공식 명칭은 AIU)에 입대했다.
그의 나이 스물 하나. 이 시퍼런 청춘이 경기도 부평 기지촌에서 “껄렁거리며”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물색조가 접근했어요. 중앙정보부 후보요원을 모집한데요. 운동만 하고 유학도 보내주고 국가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면 몇천만원도 주고 교체. 한마디로 혹한 거죠.”
서울역에 내린 그를 지프차가 데려간 곳은 남영동 모처였다. 그곳에서‘중정 후보요원들’은 한번 걸러졌다.
“가보니 팬티 바람에 있는 놈등 순 양아치들만 모인 집합소 같더라구요. 같이 간 친구 3명은 탈락하고 저만 청량리에서 군용열차를 탔습니다.”
그가 최종 당도한 곳은 강원도 속초 지역의 첩보대 훈련소였다. 동기생은 모두 100명이었다. 1년6개월간 이들은 모래배낭 메고 산악 구보, 유격등 혹독한 기본훈련을 받았다.
정훈 교육도 병행됐다. “나는 목숨을 바쳐 충성한다. 어떠한 임무도 완수한다 등 국가를 위해 죽으라는 세뇌교육이었습니다.”
기본 훈련을 마친 뒤 인간 병기로 변한 이들은 10명 단위로 나뉘어 인천대, 양구대, 남산대등 예하부대로 다시 배치됐다. 그가 옮겨간 곳은 서울의 남산대였다. 북한 침투 지역의 지형, 지물을 빼닮은 그곳 안가에서 침투, 납치, 요인 암살, 폭파, 통신, 호신술, 생존훈련등 전문 교육을 몸에 익혔다.
L씨가 침투작전에 투입된 건 70년부터로 기억된다. 7인조로 구성된 침투조는 주로 DMZ 북방 4킬로미터 이내에서 작전에 나섰다. L씨 팀의 작전 구역은 강원도 철원과 김화 인근 지역이었다.
“한번은 북한군 보충대를 폭파하고 3명은 바로 귀환했고 나머지 요원들은 인근에 잠복해있다 2개월만에 복귀하기도 했습니다. 죽은 요원들도 많았지요.”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그가 주로 활동하던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북한에 침투한 공작원중 42명이 생포되고 39명이 사살된 것으로 북한 측은 밝혔다.
복무기간 중에는 휴가란 아예 없었다. 제대를 앞둔 얼마 전 말소된 주민등록증 복구를 위해 출장 나온 게 전부였다.
L씨의 임무는 1971년 6월30일 막을 내렸다. 막상 사회에 나왔지만 처음 약속된 취업 알선은 물론이고 보상금도 지급되지 않았다.
“취업하려 해도 신원조회에 걸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그는 건축 잡부로 일하거나 서울시 빈민촌 철거반원으로 현장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나마 “사람 할 일이 못돼” 얼마 안 있다 손을 뗐다.
한국에서 절망한 L씨는 1990년 도미하며 제3의 인생을 설계했다. 부인과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다행히 참여정부 들어 북파 공작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면서 2005년 정부는 ‘특수임무 유공자 보상법’을 마련했고 그도 1차 위로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저한테는 보상 못지않게 정작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음지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명예를 정부가 인정해주었다는 사실이 더 기뻤습니다.”
그가 HID 동지들을 찾아 나선 건 바로 이 보상법이 계기가 됐다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동지회가 결성돼 친목과 권익활동을 하고 있지만 미국에 사는 동지들 중에는 이 보상법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하더군요. 좀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광고를 낸 또다른 이유는 제대한 후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친한 동기생을 찾고 싶어서다.
“그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갔다는 이야기를 한국에서 들었습니다. 불현듯 보고 싶데요.”
다행히 그가 한국일보에 광고를 낸 후 워싱턴 지역에서만 5명의 옛 동지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들은 곧 만나 회포를 나눌 예정이다.
“우리는 국가를 위해 일했다는 자부심과 긍지 하나로 살아왔습니다. 아직도 그 프라이드는 살아 있습니다.”
예순을 앞둔 L씨의 눈빛은 아직도 성성하다.
=====북파공작원 양성소 HID는?
HID는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의 약자다. 육군 첩보부대로 50년 7월 신설된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가 첩보업무를 담당하면서 HID로 처음 표기했다. 51년 독립된 육군 첩보부대로 발족됐으며 61년 영문 표기가 AIU (Army Intelligence Unit)로 바뀌었다.
72년 각 정보대를 통합해 육군 정보사(AIC)가 됐으며 90년 육해공군 정보부대를 통합, 현재의 국군 정보사령부(DIC) 체제로 일원화됐다.
북파공작원이란 공식적으로는 1952년부터 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한 무장 공작원을 말한다. 이들은 적 생포 및 사살, 주요 시설물 폭파, 첩보수집 및 후방 교란등 임무를 부여받았다.
북파공작원들은 정전협정이 남과 북의 무력도발을 금지한 까닭에 민간인 신분으로 훈련받고 북파됐다.
따라서 이 부대는 공식적으로는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당국에서도 최근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이종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