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2월은 벌거숭이가 그립다

2005-12-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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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인 칼럼/이영철 목사(밴쿠버성결교회)

벗어야 할 시간이다.
쑥스러움, 시원함, 자유로움. 오, 이 아름다운 시작이여.
냉냉한 기운이 찾아올지라도 그대여, 이제 벗을 시간이 다가왔다. 두터운 검정 겉옷들과 함께 꼭꼭 챙겨 입었던 속옷마저 벗어보자. 먼저 자연을 바라보라. 초록의 잎새들과 각양 각색의 꽃잎들이, 그 찬란했던 여름날의 광휘들이, 그 벗음의 여백으로 스며들어 이제 그대마저 끌어 안고 있구나.
모든 탐미자들이 찾아 나선 극점(極點), 거기에 바로 인간의 벗음들이 서있지 않았던가. 그 육질 속의 수분과 갈래갈래 혈관들과 세미한 세포들, 이들을 운동케하는 생기와 오묘한 창조의 숨소리를 찾아 그간 셀 수 없는 시간들을 달음박쳐 오지 않았던가. 친구여, 그의 형상인 아담과 하와가 그 벗음의 원형임을 기억하라. 종교는 궁극의 절대자를 찾아가는 구원의 여정이요 신앙은 이들 앞에서 수없는 껍질을 벗고 벗기는 거듭남의 과정이다. 나비의 가쁜함이 향내 깃든 화원을 쉽게 넘나들 듯, 독수리의 힘찬 날개짓이 드높은 창공을 제압하듯, 그런 비움과 충만으로 벗겨진 심령만이 이 사랑의 도성(都城)을 들어갈 수 있으리라. 도덕과 윤리, 지식과 수양은 그 여정의 노잣돈일 뿐이다.
하루가 천년같은, 천년이 하루같은 시간 속의 그대 나그네들이여.
철벽같은 거북등 속으로 숨어버린 우리의 정신은 두 눈만 멀뚱인채 고개만 내밀고 있구나. 오직 자신만을 알고 자신만이 살고자 한 그대는 점점 더 두꺼운 단절과 사망의 늪 속으로 빠져가고 있구나. 어느 순간 그 컴컴한 암흑의 공간에서 외로움과 상처,원망과 고독을 외쳐대지만 공허한 음향만이 귓전을 맴돌 뿐이로구나. 오해와 분노,시기와 미움, 욕설과 저주의 그 울림들이 결코 남의 것이 아님었음을 그 반향(反響)들이 알게 하는구나.
12월은, 인디언 친구여. 그대는 ‘다른 세상의 달’, ‘무소유의 달’이라 부르지 않았는가. 한겨울 그 추위가 매섭다고, 상처가 난다고, 아픔이 있다고 주저치 말라고 하라. 그 분이 두꺼운 껍질속에 나올 벗은 그대를 오늘도 고대하고 있다고 말하라. 오, 지난밤 내린 저 하늘의 백설(白雪)마저 그대를 부르고 있지 않았던가. 그대여, 벗음이 깨달음인 것을 알라. 벗음에서 그분에 관한 지식도, 절제도,인내도,경건도, 형제우애도, 사랑도 무엇인가 알게 될 것이라 전하라 .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 그대의 벗음 속에 동행하였음을 기억하게 하라. 고고한 지식도 황홀한 재화도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것, 그 끈질긴 애착과 과시는 그대의 넘치는 탐욕의 옷장들만 채울 뿐이로구나.
의심에 찬 우리 영혼들이여, 태초의 형상으로 회복하려고 그대들 은 제각기 구도(求道)의 길을 나서지 않았던가. 가는 그 길들이 힘들고 복잡하다고 얼마나 많이 회의(懷疑)하며 푸념하였던가. 진정 그대가 벗었다면 진리는 이제 명료하게 떠오를 것이라. 단아한 마음으로 다가서라. 실타레 같은 여러 사념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저 한 이론일 뿐, 때때로 미혹의 올무가 됨을 그대들은 알고 있으라.
아직 벗지 않은 우리의 군상(群狀)들을 보라. 나의 동작과 말씨는 오래전부터 뻣뻣한 석고상이 되었구나. 형식과 가식, 관행과 타성의 두꺼운 먼지들이 그대 온 몸에 쌓였구나. 숙달된 행동들과 매끄러운 소리들이 믿음이요 성숙이었다고 착각하지 마라. 미소짓는 내 얼굴 뒤로 숨어있는 미움, 거짓,교만,허세의 가면을 먼저 벗어 던져버려라. 수(數)와 양(量), 있고 없음에서 그 허상의 갑옷들을 벗어 놓고 텅빈 기쁨에 젖어보라. 나는 이 우상의 두루마기를 걸친 채 자랑과 시기, 반목과 다툼, 분열과 송사가 끊이지 않는 현실의 살아남은 끈질긴 생존(生存)이었구나. 아, 자화상이여, 그대는 이제껏 외양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에만 빠져있었구나. 그간 이 허구의 잣대들을 얼마나 많은 이웃들에게 휘둘러 왔었던가!
오, 이 마지막 달의 누드여, 그저 나를 흘끗 스쳐 지나치지 말아달라. 제발 나와 그대를 붙잡고 유혹좀 하라. 그리고 저 팽팽한 눈보라를 뚫고 그대와 함께 훨훨 날아가게 하라. 오 나의 신랑이여. 겨울나무들처럼 이 밤에도 저렇게 멋진 휘바람을 나도 불게하라. 이제 그 나신(裸身)들처럼 다가올 새하늘을 찬미하게 해달라.
12월은 무엇보다 벌거숭이가 그리워지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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