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한인 뒤의 헌신적 부모 - 정범진 판사
2005-11-28 (월)
택시기사로… 재봉일로… 30년 이민생활의 고단함
판사석 앉은 아들 보자 눈녹듯
“며칠전 판사복을 입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 맨해턴 법원을 찾았습니다. 저를 발견한 아들이 판사석 뒤에 마련된 의자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판사석 뒤에 앉아 재판을 진행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힘들었던 지난 30년간의 이민 생활이 제 머릿속에서 영화와 같이 지나갔습니다.”
67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범진 판사는 76년 당시 9세의 나이로 가족들과 함께 뉴욕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 당시 정 판사의 가족은 800달러의 돈을 가지고 이민을 왔다. 당시 플러싱 2 베드룸 한 달 렌트비는 250달러. 아파트 렌트비를 지불한 후 정씨 가족 수중에 남은 돈은 고작 200달러였다. 이후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이민 전까지 한국 신문발행부수공사의 사무국장을 역임한 정 판사의 아버지 정규동씨는 택시 운전자로 어머니 이명자씨는 맨해턴 봉제 공장으로 그들의 고된 이민 생활은 시작됐다.
정규동씨는 “이민 온지 6개월 만에 범진이가 P.S 120에서 반장으로 선출됐다”며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고 매일 매일 운전대를 잡았다”고 당시 생활을 설명했다.
1983년에는 생활고로 어머니 이명자씨도 맨해턴에서 재봉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살다 뉴욕에 돌아온지 2년만인 1984년 정 판사는 브롱스 천주교 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뉴욕 업스테이트에 위치한 콜게이트 대학에 입학한다.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하던 정 판사는 부모님의 권유로 1989년 조지 워싱턴 법대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뿐 방학을 맞아 한국 로펌에서 인턴을 하러 가기 전 인사를 하러 오던 정 판사가 빗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 판사는 좌절하지 않았다. 꾸준히 재활 치료로 어느 정도 팔도 움직일 수 있게된 그는 결국 92년 법대로 돌아갔고 93년에는 브루클린 검찰청 검사로 발령을 받게 된다.
이후 정 판사는 99년 최연소 부장검사 진급, 2004년 벤처 기업가 이수영씨와의 영화 같은 로맨스 등을 통해 결국 2005년 10월 맨해턴 형사 법원 판사로 인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