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음의 평화

2005-10-08 (토)
크게 작게

▶ 종교인 칼럼/오응기 목사(버나비 한인장로교회)

인간의 삶은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 사건의 연속이다. 그 사건 속에는 결단해야 하는 순간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인간끼리의 만남이 이뤄진다. 그 속에 대화를 통하여 서로의 감정의 흐름이 있게 된다. 서로의 대화를 살펴볼 때, 거기엔 다분히 내 마음의 상태가 문제가 될 때가 많다.
늘 선의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고 사물에 대한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다면 세상은 한결 폭넓고 축복으로 가득 찬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주전 500년경, 그리스의 시인 핀다아르는 “마음의 평화와 공정만큼 건강에 좋은 약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다.
어느 땐가 스승의 말에 화가 나서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를 궁전 계단에서 떠밀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왕을 향하여 “대왕께서 이와 같은 행패는 나의 몸을 상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대왕에게 가르치는 진리를 굽힐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윌리엄 제임스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사상가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마음이라는 것은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생활의 당연적 근거이며, 건강의 결정적 요소이다”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의학계의 원조이며 기원전 450년경의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는 영혼의 치유를 아주 중요시했던 의사이다. 그는 말하기를, “감정이 산란하여지고 약해지면 최량의 약도 효력이 없어진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의 음산함이나 자기회의나 변명 같은 것은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결국 자기의 과중한 화물이 되어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하고 발전하는 세상에 살면서 아직도 자신의 낡은 생각이나 어두운 감정의 쓰레기를 가지고 최고의 능률을 바란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낙후(落後)된 생각이나 어두운 감정의 쓰레기를 버릴 수 있다면 삶의 양태가 한결 달라진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열등감이나 가책, 자기회의를 버리고 자신의 밝은 침착성을 가질 수 있다면 삶의 모든 일이 활기를 되찾게 될 뿐만 아니라 삶의 평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잠시 실패를 했다고 해도 당황치 않고 새롭게 도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좋은 말을 했다. 생각의 흐름도 되도록 천천히 하고 마음의 평온을 사랑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 생각의 흐름과 마음의 자세에 여유를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다. 빠른 템포의 음악처럼 서두르기만 하고 목표 없이 뛰어만 가는 삶을 살아가기에 이웃을 생각할 여유나 사물을 보는 폭이 대단히 좁아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비인간화와 그리고 모든 사물에 대한 진가를 잃어버리는 현실에 살고 있다.주님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적은 일이라고 소홀히 하지 않고 이웃에 진솔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며 한 영혼이라도 구원해야 함이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다(롬 8:27-28).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 자기 마음이 자기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가진 사람은 표정이 다르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 냄새와 빛깔이 달라지고,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지는 매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도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생의 풍성함과 축복을 여전히 내려주실 줄 믿고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