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군의 위대성은 오히려 인격적 완성도에 있어”
푸른 남해를 전율시킨 역사의 힘이 400년 뒤 동북아를 관통하고 있다. 이순신(李舜臣)이다. 1545년 생, 1598년 몰. 23전 23승의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불패의 명장. 반일의 격랑을 타고 아산의 영정 안을 뛰쳐나온 장군은 소설과 브라운관에서 또는 민심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우국심과 때론 갑옷을 벗은 한 남자의 고뇌로 다가온 그에 대한 재조명은 미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워싱턴의 이내원씨(67세)는 이미 7년 전부터 먼지나는 자료와 씨름하며 그의 열혈 숭모인을 자처해왔다.
“그는 참으로 신기한 사람입니다.”
이순신에 대한 그의 평가는 다분히 함축적이다. 부하들의 목을 치는 냉엄함에 시인의 감성과 균형 잡힌 이성을 지녔던 사람.
범인의 눈으로는 좀처럼 해석 안되는 옛 인간을 들여다 봐온 그의 눈빛은 외롭고 긴장돼 있다. 마치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바다 위에서 긴장으로 핏발 선 눈빛으로 외롭게 서있는 장군처럼.
한편으로 순신을 말할 때 그의 언어는 겸허해진다.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다변임에도.
이내원이 칼 한자루에 의지해 조국을 위해 싸운 한 영웅의 역사에 몰입한 건 7년전이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던 김성한의 ‘임진왜란 7부작’이 그를 400년전 조선의 피튀기는 고된 시간속으로 이끌었다.
“철저히 사실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을 읽고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간 학교에서 배운 내용은 너무 피상적이었고 부족하기만 해 자꾸만 빠져들게 됐습니다.”
부지런히 한국을 오가며 이순신에 관한 도서와 자료는 모두 모았다.
120여권의 소장서를 대부분 독파하면서 기록과 자료마다 발견되는 차이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역사가 말하지 못하는, 기록이 구체화하지 못하는 행간의 의미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명량해전에서 장군이 격파한 왜선이 난중일기에는 330척인데 다른 총서에는 130척입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궁금증이 더하면서 자료를 모으게 됐고 결국 130척은 전선을 말하고 나머지 배는 보급 및 수송선을 의미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류는 부족함만에 있지는 않았다. 장군에 대한 과장되거나 터무니없이 영웅시하는 평가도 그를 거슬리게 했다.
“우리가 배우고 아는 이순신은 잘못된 게 너무 많습니다. 가령 임진왜란 승리를 장군 혼자의 공으로 기술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이는 의병들의 육상 봉기와 장군의 해상활약이 더해진 결과입니다. 또 이순신의 승리에는 그의 위대함 못지않게 선조들이 개발해낸 뛰어난 판옥선이나 화포 같은 장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난 세월은 그가 장군의 우국의 향기만을 쫓은 노정은 아니었다. 역사의 과잉과 결핍의 간극을 메우면서 그는 피가 흐르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 순신의 희로애락과 애욕마저도 돌아다봤다.
그래서 그는 이순신의 위대성을 불패의 전적에서보다 오히려 인격적 완성체에서 찾는다.
“장군은 어머니를 하늘로 지칭할 정도로 일상에선 효성을 앞세웠고 백성들을 귀히 여겼습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은 오늘날 남에 대한 헌신과 봉사정신입니다.
그는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는 대의와 본질을 먼저 따랐지요. 군졸의 목을 칠 때도 잘못한 그를 죽여 전체를 구하고 다스린다는 측면을 생각했습니다.
또 장군은 한산도 고금도에 운주당을 설치하고 신문고처럼 군졸들 누구나 건의가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미 400년 전에 민주주의를 실천한 분이지요.”
오늘날 본받아야 할 이순신의 가장 큰 덕목이 애민, 인본 사상과 나라사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흔들리는 인간이었다. 순신에 빠져들수록 믿음은 온전치 않았다.
“장군을 연구하며 그의 인격에 흠모됐지만 확신을 갖지 못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작가인 박경리 선생의 장군에 대한 평가를 접하고 안도했습니다. 박 선생은 ‘이순신은 개인의 욕심이나 영광을 위해 싸운 게 아니라 백성의 편안한 삶이 침탈 당한데 대해 항거한 선비다. 그는 무장이 아니면 시인이나 학자가 됐을 것이다. 이순신은 우리 시대가 도달할 인격의 전형이다’라고 했습니다. 제 생각은 비로소 확고함을 갖춘 것이지요.”
인격적 완성체로서의 충무공은 그래서 승패만이 있는 자본주의의 전장에서 누구보다 유용한 교육 모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한국 교육이 망가진 건 인성교육이 부재한 탓입니다. 이순신 같은 훌륭한 모델을 교육 자료화하지 못해서이지요. 난중일기는 국민 필독서가 돼야 합니다.”
이미 그는 서재에만 있지 않고 실천의 길로 나섰다. 한글학교를 찾아다니며 충무공을 알리고 이순신 교육용 비디오 350권을 복사, 무료로 배포했다. 올 7월에는 50권을 추가해 전국에 나눠줄 예정이다. 모두 자신의 주머니를 턴 것이다.
“칭찬받을 일은 아닙니다. 작지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한 것뿐입니다. 다행히 아내가 다른 일을 할 때는 핀잔을 해도 이순신 연구만은 좋아해서 같이 읽기도 해 큰 힘이 됐습니다.”
이순신에 대한 강연과 글로 이름이 오르내리며 장군과 같은 덕수 이씨 후예가 아니냐는 오해도 받지만 기실 그의 본관은 전주다. 대전 생으로 서울대를 마치고 1975년 이민, 버지니아 비엔나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한편으론 한인학교협의회 전국 이사, 워싱턴 통합한인학교 이사, 한미장학재단 이사로 2세 교육에 관심을 쏟아왔다.
지금까지 그의 활동은 이순신 숭모인으로서 개인 차원에 그쳤지만 앞으로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어 함께 연구하고 동포사회에 알리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이순신 정신의 바로 세우기는 국민과 동포들 모두의 의무와 책임”이라고 강조하는 이내원은 어찌보면 이순신을 사랑한 사람이다.
<이종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