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철 칼럼 거기 누구 없소
2004-08-14 (토) 12:00:00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아무도 없소”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끊어질듯 들릴 듯 말듯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가 어느 방에선가 가냘프게 흘러나온다. 이 목소리가 계속돼도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다.
간호사 데스크에 앉아서 환자 차트를 기록하던 나는 묻는다. “아니 왜 아무도 저 사람에게 대답을 안 하는 거요?” “여봐요 앨리스씨, 저기 저 환자분이 부르지 않소.”
그러자, 그 간호사가 대답하기를 “늘 그래요 저 할머니. 가도 해줄 것도 없다구요. 계속 저말만 하구 있어요.”
‘그래… 저렇게 누구를 애타게 찾는 데도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단 말인가…’
나는 문득, 한국에서 노년으로 당뇨병과 노인성 건망증, 팔뼈, 어깨뼈, 쇄골뼈가 부러졌지만 골다공증으로 뼈가 붙지를 않아 고통만 계속되는 병을 앓으시는 어머니 생각이 난다. 2개월마다 한번씩 돌아가실 것 같아서 한국에 나갔다가 그래도 간호한답시고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어머니 방에서 같이 자면서 간호를 한다. 거의 매시간 깨어나서 소변을 보고 아니면 별 할 일도 없이 괜히 깨어나서 “얘들아~ 일어나라~ 얘들아 일어나라” 하시는 바람에 벌떡 벌떡 일어나서 “왜 그러세요?”라고 물어보면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으시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불러서 깨우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어머니는 오늘도 밤에 부르시겠지…
물 건너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아들, 멀리서 아무 것도 못해 드리는 심정. 그러나 더 난감한 것은 옆에 있어도 “여보세요, 여보세요, 일어나라” 이렇게 부르실 때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그 마음이 더 착잡하다. 부르는 사람은 있어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고. 듣고 대답하고 싶은데 더 이상 무엇을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사이코 테라피(심리치료) 중 핵심적인 요소는 감정이입이다. 열이 나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쳐다보는 어머니의 감정, 죽어 가는 사람을 품에 안고 땀을 닦아주는 테레사 수녀의 모습, 이런 감정상태를 말한다. 어머니처럼 할머니처럼 아픔을 고요히 감싸주는 그 품이 그립다. 아이고 불쌍해라 하고 같이 울어주는 것은 대부분 자기의 처량한 신세한탄으로 그치는 값싼 동정이고 진정 남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동정도 성숙한 감정은 아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더 깊은 의미로 잃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긴 세월 살아오면서 이렇게 저렇게 외로운 날들, 누군가 그리운 날들, 그래서 쌓여진 삶의 어느 한 시점에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누군가를 기다리던 날은 얼마나 많았던가.
정다운 사람 다정한 사람 친절한 사람 옆에 있어도 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 하는가. 한영애의 ‘거기 누구 없소‘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어둠은 늘 그렇게 벌써 깔려있어.
창문에 두드리는 달빛에 대답하듯/ 검어진 골목길에 그냥 한번 불러봤어.
날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 모두/ 오늘밤도 편안히들 주무시고 계시는지
밤이 너무 긴 것 같은 생각에 아침을 보려/ 아침을 보려하네.
나와 같이 누구 아침을/ 볼 사람 거기 없소/ 누군가 깨었다면/ 내게 대답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