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로 보는 한인사 (3)
▶ 한인교회 최초 담임 필유일 목사
1966년 10월 마지막 주일 볼티모어 시내 러블리 레인 감리교회에서 1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예배를 올렸다. 볼티모어 최초의 한인교회가 설립되는 순간이었다.
방은호, 이영희, 임학서씨 등은 수주일 전 보트가 전복돼 익사한 박 모 박사의 장례를 치르면서 한인교회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유학와서 학위 취득후 미회사에서 근무하던 박 박사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당시 워싱턴지역에서 목회하던 2명의 한인 목사중 한 명에게 부탁, 겨우 장례를 마쳤던 이들은 이번 기회에 볼티모어 지역에서도 한인교회를 만들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들은 매주 지역 목사들을 초청, 예배를 갖다 이듬해인 1967년 9월 당시 시카고에 거주하던 필유일 목사를 초빙, 정식으로 볼티모어한인연합교회(이하 연합교회)를 출범시켰다.
연합교회는 22가와 세인트 폴 스트릿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볼티모어에서 가장 오랜 교회인 러블리 레인 감리교회를 빌려 예배를 보다, 1972년 2월 라크 레이븐 블러바드 5400블록의 훼이스 장로교회로 옮겼으며, 1977년 8월 14일 롤링로드 선상의 미국 교회를 매입, 역시 최초의 한인 자체교회를 갖게 된다.
필유일 목사(76.사진)는 함남 장진 출생으로 광주사범학교와 경희대를 졸업하고, 장로회 신학대학을 거쳐 1958년 7월 필라델피아의 이스턴 침례신학대로 유학 왔다. 미국 오기전 5년간 서울 침례교회에서 시무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필목사는 5세때 부친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교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신학공부중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의 전신인 한국성서클럽을 조직, 2대 목사를 지내다 1962년 신학교 졸업후 인디애나 사우스 벤드의 미국인 교회에서 1년간 부목사를 역임했다. 웨스턴 미시간 대학원에서 도서관학을 공부한 필 목사는 1963년부터 시카고의 자연사 박물관 도서관에서 근무하다 1967년부터 연합교회 부임과 함께 볼티모어로 옮겨와 1973년까지 시내 공립도서관에서 일했다.
필 목사는 한국서부터 알고 지내던 외과의 박진우씨가 볼티모어의 한인교회서 목회할 것을 권유, 볼티모어로 옮겨왔다. 필 목사가 초대 담임으로 부임한 연합교회는 당시 의사, 교수, 유학생을 중심으로 20여명의 신자가 출석했다.
7년간 재임하면서 신자수가 100명을 넘어서게 되자 필 목사는 도서관 근무를 그만두고 교회일에만 전념하게 되니 볼티모어지역 최초의 ‘풀타임’ 한인교회 목사 탄생은 1973년인 셈이다.
그 후 교인수가 계속 증가, 300여명으로 불어나자 1977년 시 서쪽 13에이커의 넓은 부지에 600석의 현대식 본당과 교육관, 교역자 주택이 완비된 교회를 신자들의 건축헌금으로 구입하게 된다. 미국 교회를 사용할 당시 수세식 화장실 사용법을 모를 정도로 미국 문화에 익숙지 못한 교인들의 잦은 실수로 미국교회와 마찰이 많았고, 이는 결국 자체교회 마련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다.
필 목사는 1994년까지 만 27년간 봉직후 원로목사로 은퇴했으며, 현재 김혜영 사모와 콜럼비아에 거주하고 있다.
필 목사 재임중 일부 신자들이 분화해 나가 벧엘교회와 볼티모어교회 등을 세워 지역 대형 한인교회의 모태이기도 한 연합교회는 한때 교인수가 500-600여명에 달했으나 은퇴 후 후임 목사가 무자격자로 판명나면서 위기를 겪어 현재 100여명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필 목사는 한국을 떠날 당시 교파가 3개에 불과했으나 이후 50여개로 늘어났지만 이를 알지 못해 신자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교회 분화 당시를 회고했다. 한기덕 트리플씨 도매상 대표도 이 교회 학생회장 출신이다. 이 교회는 필 목사의 처남이자 메릴랜드한인회장을 역임한 김창호 목사가 목회 중이며, 이름도 새생명 장로교회로 바꿨다.
필 목사는 부임 당시 볼티모어의 한인인구가 30-40여명으로 기억한다. 주로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중인 의사들이 많았으며, 대부분 유학생 아니면 전문직 종사자 였다고. 이영근, 김정욱(이상 존스합킨스대 물리학), 다니엘 김(카핀대 사회학) 등 교수도 3명 있었다.
볼티모어지역에는 1969년 12월을 기점으로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한인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1975-1980년 러시를 이뤘다. 연합교회는 1970년대 경제적으로 어려운 초기 이민자들이 서로 만나 향수를 달래며 위로하는 커뮤니티 센터로 역할, 개신교, 천주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출석했다. 1년에 1-2회 갖는 야유회에는 국제결혼한 부부도 100여명 이상이 참가했다고 한다. 필 목사는 초기 이민자들의 미국 정착을 돕기 위해 통역 등 커뮤니티 서비스가 주활동 중 하나였다고.
40년 가까이 한인사회를 지켜본 필 목사는 경제력 향상과 2세들의 주류사회 진입을 한인사회의 가장 큰 변화로 꼽았다. 하지만 그 이면 청소년들의 절도 및 마약 등 어두운 면의 발생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기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