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은둔

2003-12-1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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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칼럼]

▶ 전지은<간호사>


이틀 동안 전화벨 한번 울리지 않았다. 물론 낯선 방문객이 있을 리도 없다. 쿵쿵 울리며 걸어 보아도 제 그림자를 밟는 술래잡기 마냥 재미가 없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하지 않은 것도 몇 일 족히 된다. 말문을 닫은 탓일까, 퇴근 후의 남편에게도 별 이야길 하지 않았다. 깊은 산사에서 도를 닦거나 일탈의 진리를 깨닫기 위한 고행을 시작한 것도 아닌 난, 이 무료함에 익숙해 질 시간은 언제쯤일까.

산적한 이삿짐들 사이로 침잠의 시간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어쩌지 못한 채 그냥 틈을 내주고 말았다. 사추기의 감상 같은 것들은 잔뜩 찌푸린 날씨 탓이라고 일갈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들지 않았던가. 필요 없는 상념 따위들은 산재한 일거리들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 나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몸보다 마음이 천근처럼 무거워지는 것, 때늦은 낯갈이의 전주곡인 것 같아 지레 겁을 먹는다.

마음을 다잡으며 쌓여 있는 이삿짐 박스를 또 하나씩 풀며 세상의 씨줄과 날줄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왔음을 본다. 소중했던 추억, 아픈 기억, 만남의 시간들이 선명한 자국으로 남아 있다. 조심스레 한발씩 내딛어야 할 것 같고, 갇혀져 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며 박하사탕을 조금씩 할타먹듯 조금씩 음미해 봐야 할 것도 같다. 서걱이는 머리 속을 애써 뿌리치며 무거운 것들을 들고, 내리며, 옮긴다. 예전처럼 제자리를 잡은 부엌 살림들과 책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책상 위의 컴퓨터. 최소한의 행동반경에 별 불편함이 없게되자 조금의 안도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짐을 옮기며 온몸에 베어 나는 땀은 일상의 윤활유가 되어 조금 전의 삐걱거림을 없애 주기에 충분하다.


라디오의 채널을 맞추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청한다. 적막감을 깨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소리 속엔 오늘도 아프칸에선 무고한 생명이 죽어간다고 알린다. 누구를 위한 희생이며, 평화이던가. 차라리 이쯤에서 듣고 보지 않고 사는 것이 진정한 평화일수도 있겠다는 극히 이기적인 마음이 든다. 적막하지만 누구도 내 하루를 방해하지 않으며, 아니 방해를 허락하지 않으며 혼자인 시간. 충분히 혼자임을 음미 할 수 있는 것. 라디오를 끈다. 다시 쥐 죽은 듯 고요해 지는 나만의 공간 안에서 스스로 은둔자가 되어 볼 생각이다.

이 적막함, 고요, 평화.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지 아직은 모른다. 이틀쯤 더 지낼 수도 있고 일주이나 이주일, 아니면 한 겨울을 지날 수도 있겠지.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갈 수도 있고, 전화를 걸어 친구들의 근황을 묻거나 나의 이야기들을 과장된 허풍을 섞어가며 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씩 돌아보며 격리되어 침잠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동안 얼마나 숨차게 달려 왔던가. 삶의 고비 고비에서 삐걱이는 불협화음도 있었고 거친 몸짓으로 자타에게 아픔을 준 적도 많았다. 이쯤에서 쉬어가라는 어느 분의 뜻이었을까,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를 스스로 붙여 보며 은둔의 시간을 마련한다. 언제쯤 이 은둔지에서 또 살짝 빠져 나와 앞을 향해 더 크고 빠른 걸음을 떼어놓을 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오늘은 이곳에서 쌀쌀하지만 작은 뒷산 우듬지 위로 불어드는 바람들과 친구를 삼고, 들 토끼들에게 푸른 잎들을 던져 주며 그들의 표정을 훔쳐보고 싶다. 내게 주어진 감미로운 평화, 이것을 꼬옥 보듬어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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