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태풍의 수해로 고국에 어려움이 있을 때, 온 국민과 해외의 교민들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작은 정성을 보탬으로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그 태풍의 피해가 있기 전에는 수혜자들 역시 다른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주는 자가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받는 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받는 자의 입장에 있을 때는 좋아하며 더 원하는 마음을 갖으면서도, 주는 자의 입장에는 있고자 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내게 언제 그런 일이 생기겠냐 하며 너무도 인색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한번 어려운 입장에 있어 본 사람들은 그래도 주는 입장에 덜 인색한 반면, 조금 여유 있어 보인다 생각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욱 그들의 보따리를 꽉 쥐어 잡고 풀려고 하지 않으니 조금 입맛이 씁쓸하다.
학창시절 등하교 때 조금 꺼리는 것이 있었다. 지하철을 이용하려고 지하도로 다가가면 언제나 하얀 버스 한 대가 그 입구에 서 있고 조금은 아가씨의 나이가 지난 듯한 여인들이 지나는 사람, 특히 젊은 학생들이나 군인들을 많이 유혹(?)했다. 헌혈을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서워 지하도에서 나올 때는 헌혈차에서 먼 쪽으로 얼른 달리듯이 가버리고 지하철을 타러갈 때는 다른 사람의 뒤에 살짝 따라 붙어서 가곤 하였다.
사내가 겁이 많다고 종종 사람들이 놀리기도 하면, 〈효경(孝經)〉에 있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문구를 들어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라 하니, 부모님께 효도하려고 바늘이 내 몸에 침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농담하곤 했다. 또한 왠지 붉은 피를 보면 섬뜩한 생각이 들어 헌혈이라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해보며 항상 몸에 넘쳐나는 나의 피 한 방울이 다른 사람에게 뭐 그리 소중하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수술을 하게될 때 그들이 때로는 수혈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누군가가 헌혈을 해 주지 않았다면 나의 식구나 친지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되겠나 생각해보니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절로 나왔다. ‘아, 그렇게 남을 위해 베푸는 사람이 있기에 이렇게 받는 우리가 있는 것이구나. 지금까지 나의 삶은 주는 자의 입장에 있었는가.’ 돌아보니 부끄러운 받는 자의 생활이었다 생각되어 작은 도움이나마 된다면 어떨까하는 마음에 팔을 걷고 헌혈대에 올랐다. 남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내 안에 갇혀있던 생각을 깨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모습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그런 모습에 이맛살만 찌푸린 것이다.
그 날 퇴근 후, 아이에게 아빠 헌혈했다고 하니 그게 뭔데 한다. 내 피를 뽑아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 하니 아직은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 덕분에 온 가족이 웃었다.
아빠, 나도 헌혈했다. 뭐, 네가 언제 헌혈했다고.... 조금 전에 모기가 내 피를 빨아먹었는데, 그게 헌혈이잖아. 에라, 이 녀석아.
그런데 문득 그 소리를 들으니 정치하는 사람들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그들은 국민에게 도움을 주는 자인지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