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와인 저장고

2003-11-1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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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거나 우울할 때면 나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틀어놓고 와인 냉장고 앞으로 간다. 반 정도 찬 와인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아픈 것도 잊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제 와인 냉장고 앞은 내가 우리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별로 많지 않은 와인이기에, 한병 한병 어디서 얼마 주고 구입했고, 언제 누구에게서 선물 받았는지를 모두 기억할 수 있다.

와인 냉장고를 구입하고 와인을 저장해놓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오래된 와인은 별로 없지만, 97년 캘리포니아산 적포도주들이 꽤 있다. 벌써 6년이 된 와인이지만, 2007년부터 한병씩 꺼내서 마셔볼 생각이다. 이 와인은 누구와 언제 마셔야지.. 하는 계획도 세우곤 하지만, 4년 후에 내가 누구와 가깝게 지내고 와인을 마시며 어울릴지 모르는 일이라 같이 마실 사람들 목록은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와인 냉장고를 소유하고나서 가장 즐거운 일은 역시 현재의 가격이 구입했을 당시의 가격보다 훨씬 더 비싸진 와인을 들여다보며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낄 때이다. 예를 들자면 나파밸리의 세인트 수페리 1997년 메리타지 레드의 경우 구입했을 때의 가격은 40달러 미만이었는데, 현재 구입하려면 70달러이고, 당시 병당 13~17달러였던 같은 와이너리의 1997년 멜로는 현재 구입하려면 50달러 가까이 지불해야 한다.


케이스로 구입한 것도 아니고, 한병씩 구입해서 넣어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내다가 팔아서 차익을 챙길 것도 아니면서, 나는 50달러에 사서 마시는 사람들보다 훨씬 싼 가격에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괜히 으쓱해진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그 때 좀 무리를 해서라도 이런 저런 와인을 장만해서 넣어두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 또한 함께 느낀다.

지난 20년간 와인의 가격은 거의 변동이 없었다고 보아야 하는 만큼, 값비싼 와인 냉장고를 구입해서 이런 와인들을 넣어두고 전기료를 지불해가며 보관하는 것은 어리석게 느껴질 때도 있다. 예를 들자면, 값비싼 백포도주 중 하나로 여겨지는 1981년 빈티지 라빌 오브리옹(Laville Haut Brion)은 1985년에 45달러의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는데, 2000년 빈티지 라빌 오브리옹을 2003년 현재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은 80달러이다. 지난 18년간의 인플레이션을 계산에 넣어서 1985년의 45달러를 현시가로 환산해보면 약 78달러가 되므로 와인의 가격은 18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샤토 마고, 오브리옹, 라피트, 무통 로실드, 라투르, 페트루스, 로마네 콩티 등 이름만 들어도 전세계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와인들은 수십년 동안 그 품질이 증명되어 왔기 때문에, 혹은 희귀성 때문에, 혹은 이름 때문에 저장을 해 두었다가 10년~20년 후에 되팔면 빈티지에 따라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다. 예를 들어서 1998년 빈티지 샤토 무통 로실드는 약 180달러의 가격에 구할 수 있지만, 이보다 10년전 빈티지인 1988년 빈티지 무통 로실드는 현재 98년의 두배에 가까운 350달러의 가격에 인터넷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싸게 구입해도 한 병에 200달러 가까이 하는 와인을 여러 병 사놓기도 힘든 일이고, 10년~20년이 지난 후 아까와서 마시지도 못하고 되팔기만 한다면, 차라리 와인보다는 주식에 투자를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와인 애호가가 와인 저장고를 구입하는 이유가 나중에 되팔아서 이익을 남기고자 한다면 올바른 마음가짐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와인 저장고의 첫째 목적은 내가 와인을 더욱 즐길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15년된 샤토 라피트를 살 돈은 없지만 지금 사두었다가 15년 후에 마실 수 있다는 즐거움에 라피트를 한 병 사서 넣어둔 사람도 있고, 마셔보았던 와인 중 숙성시켰을 때 더욱 깊은 맛을 낼 가능성이 있는 와인만 케이스로 사서 와인 저장고에 숙성시키며 해가 지남에 따라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음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와인 전문지에서 좋은 평을 받은 와인을 구입하여 5년~20년 후에 마시기 위해 저장고에 넣어두는 사람도 있다.

와인 냉장고를 구입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가장 큰 사이즈를 구입할 것을 권하고 싶다. 200병을 저장할 수 있는 와인 냉장고의 경우, 처음에는 200병이 많다고 생각되겠지만, 10년~20년을 저장해서 마실 와인을 넣어두었을 때, 한달에 10병만 채워 넣는다고 해도 2년 안에 꽉 차버려서 더 이상 좋은 와인을 채워 넣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입할 때 전기를 꽂아보아 가동되는 상태를 점검하고 심한 진동이나 소음이 없는 것을 구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심한 진동은 와인에게 있어서 치명적이기 때문이고, 냉장고를 소유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겠지만, 가동될 때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와인 냉장고는 소유하는 즐거움과 긍지를 많은 부분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최선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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