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콜럼버스의 달걀

2003-10-04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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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익환 칼럼

1492년 10월 12일, 이날은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인도(印度)로 가는 서방 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스페인의 팔로스 항구를 출발, 현재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 섬에 도착한 날이다.

이 서방 항로에 투입된 스페인 항해단의 규모는 대형 범선(帆船) 3척에 대부분 스페인 국적을 가진 선원 120명이다. 해적에 대비하기 위해 중무장도 했다. 콜럼버스의 형이 탄 삔다호가 선두에 섰고, 아우가 탄 에나호가 콜럼버스가 탄 산타·마리아호의 뒤를 따랐다.

험난한 대서양의 파도를 헤쳐가는 동안 콜럼버스는 해적들과 수 차례 싸우기도 하고, 항해에 지쳐 귀항(歸港)하자는 선원들의 ‘해상 반란’을 겪기도 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수평선을 항해한지 70일째 되는 어느 날 새벽 2시경이었다.


돌연 선두에 선 삔다호에서 1발의 조명탄이 서쪽을 향해 발사되었다. 화광이 먼 육지를 비치는 순간 선원들은 「육지! 육지! 육지가 보인다!」고 서로 부둥켜 안고 미칠 듯이 기뻐했다.

저 육지에는 어떤 인간들이 살고 있을까, 과연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 있는 천국과 같은 곳일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배는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무성한 원시림이 우거져 있었으며 그 숲 사이로 벌거벗은 인디안 들이 떼지어 나왔다.
그들은 컬럼버스 일행을 보고 경계하는 기색이었으며 컬럼버스는 감격하여 대지에 입을 맞추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뜻으로 ‘산살바돌’이라는 이름을 이 곳에 부쳤다.

콜럼버스는 그 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멕시코 만 일대를 탐험하였지만 문제는 그 땅이 거대한 신대륙(新大陸)인 것을 모르고 인도(印度)의 한 변두리로 잘못 생각하였다. 그로 인해 신대륙의 명칭은 그의 이름을 따지 못하고, 그 뒤 이 지역을 탐험하고 신대륙임을 밝힌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부쳐졌다.

당초 콜럼버스는 아시아로 가는 서방 항로 개척에 관심이 컸던 스페인 여왕 이사벨 1세와 맺은 계약에서 콜럼버스는 새로 발견한 토지의 부왕(副王)으로 임명되고 그 땅에서 나오는 모든 귀금속의 10분의 1을 갖게 되있었다.

콜럼버스가 미지의 땅에서 가져간 금괴는 유럽인들에게 큰 의욕을 주었지만 그의 대서양 항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콜럼버스는 그들에게 달걀을 세울 수 있느냐고 물은 뒤 고개를 젓는 사람들 앞에서 달걀 아래를 깨 세워 보임으로써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일화를 만들어냈다. ‘알고 보면 쉬운 일이지만 알 때까지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일종의 암시(暗示)다.

브렌트 보우어스는 그의 저서 「1천년, 1천인」에서 지난 1천년 동안 인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 1천명을 선정해 순위를 매겼다.


이에 따르면 요하네스 구텐베르그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각각 1, 2위로 선정되었다. 구텐베르그는 금속활자를 발명해 서적을 대량생산하여 인간의 지적공간을 넓히고,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함으로써 인류의 활동 무대를 넓혔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가 세계 석학들을 대상으로 지난 1천년간 20개 분야에서 ‘최선과 최악’을 조사한 결과에서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최악의 사고’인 것으로 나타났다.

콜럼버스의 탐험 이후 많은 탐험대에 의해 막대한 양의 금은보석과 사탕수수, 담배, 감자, 옥수수 등 새로운 농작물이 유럽으로 유입됐다.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은 축복의 땅이었다. 하지만 신대륙의 원주민 입장에서는 엄청난 재앙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신대륙 발견 후 원주민 1천6백만명, 그리고 같은 숫자의 아프리카 흑인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신대륙 개척’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몇 년전 10월 12일 ‘콜럼버스의 날’에는 중남미 온두라스에서 흥미 있는 재판이 열리기도 했다. 현지 인디언들이 주관한 재판에서 콜럼버스는 유럽인들이 저지른 야만행위의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으로 기소됐다. 재판 결과 극형이 내려졌고, 궁사(弓士)들은 콜럼버스의 허수아비를 향해 화살을 쐈다.

미대륙을 어떤 외래민족이 선점(先占)했는가에 대해 현재까지는 1만3,000여년 전 연해주 해협이 빙하(氷河)로 얼어붙어 연육(連陸)돼 있을 때 알래스카를 통해 남하한 몽고계 인종이라는 게 유력한 학설이다.

그 증거로 중미 에콰도르의 인디오는 검은머리에 얼굴 모양이 한국인과 같고, 엉덩이에 몽골 반점이 나 있는 것이며, 초가 토담집에서 흰옷에 아기를 업어 기르는 것이며, 옥수수를 발효시켜 막걸리를 담궈 먹는 것이며, 담뱃대를 ‘답뽀떼’, 예쁘다를 ‘이쁘나’로 발음하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유럽인으로 미대륙으로 건너간 사람은 10세기경에 바이킹족으로 불리는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북미 북쪽 해안에 도착한 것이 최초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누가 먼저 미대륙에 정착했느냐보다 우리로서는 언제부터 우리 한민족이 미대륙에 정착하여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이것이 관심사인 것이다.

이 부분을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전사(前史) 형식으로 ‘미주 한인 100년사’에 실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알 때까지 세상에 쉬운 일은 없겠지만 재미 석학들이 힘을 합치면 ‘컬럼버스의 달걀’ 같이 못할 일도 없을 것으로 본다.

/ikhchang@aol.com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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