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2003-07-24 (목) 12:00:00
얼마 전, 아는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그 중에는 12학년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농촌에서의 삶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왜 그렇게 살려고 하는지’,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돈 벌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닌지’, ‘실패했을 경우에 대비한 다른 계획은 있는지’등. 우리 부부는 우리가 생각하고, 공부하고, 느끼고, 깨달아 왔던 것들을 별다른 두서 없이 얘기 하고 이해 시키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늘 무슨 말을 했지?
우리는 농촌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살려고 한다. 스캇과 헬렌의 삶을 본보기 삼아서 말이다. 우리가 먹을 것은 가능하면 직접 지어 먹고,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집 뒤에 있는 산을 오르내리면서 산에 있는 계곡 물과, 나무와 꽃, 풀 한 포기에서 배어나오는 순수를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어느 곳에 묶이어 강제되어지는 삶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 가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럴수록 삶이 더 고될 수도 있지만 배우는 것도 많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우리가 하는 말, 글, 행동 등의 표현 수단은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을 말로 정확하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듣는 사람이 그 감동을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말을 통해서 라기 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그 감동은 상대방의 감동이 아니라 자신의 감동이다. 그리고 그 감동은 서로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에 말한 농촌에서의 삶도 여러 가지 형태로 받아 들여 질 것이다.나는 그 학생과의 대화를 통해서 내가 말하려는 것을 제대로 표현했는지, 잘못 전달된 것으로 아직 어린 그 학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는지,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 난 최근 큰 실수를 통해서 이것을 깨달았다. 한계가 분명한 표현 수단을 통해서 상대방의 생각이나 마음을 읽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를 이해한다, 못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대신 있는 그대로 보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