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칠레의 와인

2003-06-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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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당 50달러의 와인이 5달러짜리보다 훨씬 더 맛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와인을 자주 마시는 애호가들 중 매번 한병에 40~50 달러나 하는 비싼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초보와 전문가를 막론하고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값싸고 맛있는 와인을 찾는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격 대비 품질이 고르게 우수한 와인으로는 단연코 칠레산 와인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대부분의 칠레 와인은 5~15달러 사이다.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는 수입 와인 중 칠레산 와인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뒤를 이어 세번째로 많은 양이 판매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칠레의 콘차 이 토로(Concha y Toro)는 미국내 전체 수입 와인 중 판매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1996년에 10만 케이스의 와인을 미국에 수출한 칠레는 2000년에는 수출량이 5백만 케이스를 넘으면서 해마다 그 인기를 더하고 있다.

남미에 바다를 끼고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의 국토를 가진 칠레는 포도재배에 더 없이 좋은 자연조건을 부여받았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을, 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이 길게 병풍처럼 쳐 있는 칠레는 지형상 주변 국가들로부터 고립된 형태를 띄고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필록세라(phylloxera) 균으로 인해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국가의 포도 농작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유독 칠레만은 그 피해를 입지 않고 고유 포도 품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별다른 변화 없이 길고 건조한 여름과 추운 겨울은 포도를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매해 빈티지의 차이가 거의 없이 항상 고르게 우수한 포도주를 빚어낼 수 있는 큰 이유가 된다.

칠레에서 와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지는 450년이 넘는다. 기록에 의하면 1551년에 포도를 심기 시작해서 4년 뒤인 1555년에 첫 포도주가 빚어졌다. 1800년대 중반에는 프랑스로부터 카버네 소비뇽과 멜로 등의 품종을 들여오기 시작하면서 칠레의 와인 산업은 활기를 띄게 되었다. 프랑스가 1870년대에 필록세라균으로 인해 모든 포도를 새로 심었어야 했으나 그 전에 포도 품종들을 프랑스에서 들여온 칠레는 현재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옛 프랑스 와인의 영광을 자신들이 이어받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1938년 칠레 정부가 새로 포도를 심는 작업을 일체 불허한다는 령을 발포하고, 그 법이 1974년에 와서야 없어질 때까지 칠레의 와인 산업은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칠레에서 와인 산업이 다시 부흥하게 된 시기는 불과 20년전인 1980년대 초이며, 프랑스산 오크통 숙성방식과 새로운 스테인레스스틸 통 숙성방식을 접목시키면서 와인 제조 기법에 있어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불과 8년전인 1995년에 12개밖에 없었던 칠레의 와이너리는 현재 70여개에 달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이다.

칠레산 와인은 1850년대 보르도 스타일 품종들을 프랑스에서 들여오면서 와인 산업이 번창해온 탓에 미국이나 호주 등 새로운 와인산지의 강한 맛보다는 유럽의 우아한 맛과 향을 지향한다. 칠레 포도주의 특징 중 하나는 과일의 향과 맛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있는데, 과일향이 무척 강하면서도 어딘가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을 주는 미국과 호주 와인에 비해 훨씬 더 세련됨을 자랑한다. 아직까지 오랜 시간 숙성된 칠레 와인에 대한 검증은 확립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칠레 와인은 출시되자마자 영(young)한 상태에서 마셔도 맛있다.

칠레 적포도주의 빈티지 중 1997년과 1999년은 매우 뛰어난 해로 꼽히는데 특히 97년은 칠레 와인 산업 역사상 가장 뛰어난 빈티지로 꼽힐 만큼 성공적인 해였고, 99년은 심한 가뭄으로 포도 수확량이 적어서 와인 생산량도 줄었기 때문에 더욱 기억되는 빈티지이다.


<최선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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