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와인은 내가 만든다”

2003-02-12 (수)
크게 작게

‘더 와인메이킹 스토어’

와인은 혼자 마실 때 보다 잘 맞는 음식과 함께, 그리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한다. 내 주변에는 나와 함께 와인을 즐기는 친구들이 몇 있는데, 그들과 함께 마시는 와인은 항상 최고의 맛을 선사한다. 같은 와인이라도 분위기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는데 모두들 동의하며 와인을 즐긴다. 와인은 인생을 좀 더 즐겁게 하는 도구임에 분명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마시는가에 따라 그 즐거움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 같다. 하물며 내가 직접 만든 와인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즐기면 그 맛과 즐거움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즈니사, 워너사, NBC 방송국 등이 모여있는 버뱅크에는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삶을 좀 더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특별한 곳이 있다. ‘더 와인메이킹 스토어’(The Winemaking Store). 직접 자신이 와인을 만들어서 병에 담아 가져갈 수 있도록 모든 과정을 도와주고 재료를 제공해주는 스토어이다. 자그마한 스토어이지만 이 곳에 들어서면 네덜란드 이민자 피터 벤틀리와 영국 이민자 파트리샤 벤틀리 부부가 편안하게 반긴다. 입구 우측에는 작은 테이스팅 바도 마련되어 있어서 이 곳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의 맛을 시음할 수도 있다.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직접 포장되어 수송되어온 포도 원액부터, 몬다비 와이너리 소유의 우드브리지 포도 원액, 그리고 북미 여러 포도원의 포도 원액까지 다양한 지역과 품종의 포도 원액 중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패트리샤의 도움으로 포도주를 한 통 직접 만들고 나면, 약 6주 후에 완성된 포도주를 병에 옮겨담을 수 있다.


카버네 소비뇽, 멜로, 진판델, 시라, 피노 누아, 샤도네, 리즐링, 소비뇽 블랑, 게부르츠트라미너, 화이트 진판델 등 원하는 모든 종류의 포도주 품종을 찾을 수 있으며, 카버네의 경우 호주, 남아공, 미국, 칠레 등 여러 지역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이곳을 방문했을 때 마침 6주 전 담궈 놓은 이탈리아 몬테풀치노 적포도를 병에 담는 작업을 하러 온 샌드라 샤베즈와 클라우디오 판티니 부부를 만나서 그들이 작업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와인 병 꼭지 부분에 씌울 포일을 무슨 색깔로 할 것인가를 오랜 시간 상의를 거쳐 정한 후, 부부가 가져온 29개의 병을 소독하고 씻어낸 후 말리고, 포도주가 담긴 통을 호스로 연결하여 한 병씩 채우고, 코르크로 막는 작업이었다.

스토어에서 제공하는 적포도주 빛깔의 앞치마를 입은 젊은 부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와인을 병에 옮겨 담으며 “마치 아이가 탄생하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라고 흥분을 전했다. 그들은 직접 디자인해서 복사해 온 와인 레이블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과정은 매우 쉬워보였다. 부인 샌드라는, 가장 어려웠던 과정이 집에 모아둔 와인 병의 레이블을 물에 불려서 떼어내는 작업이었을 정도로 다른 모든 절차는 쉽다고 말했다.

내달 아르헨티나에 사는 남편의 가족들을 방문할 때 한두병 가져갈 계획이고, 만들어진 와인 29병을 매우 가까운 친구와 가족에게만 서너병 나눠주고 나머지는 모두 자신들이 마실 계획이라며 활짝 웃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함께 만들어서 마시는 와인은 그 나누는 즐거움이 훨씬 더 클 것이기에, 그들 부부를 보면서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곳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은 품종에 따라 3년에서 5년까지 보관이 가능하다니, 신혼부부가 함께 와인을 만들어서 결혼식을 올린 해의 기념 와인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다가 향후 5년동안 매 결혼 기념일마다 마셔도 그 의미가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을 찾는 한인 고객도 10여명정도 있다고 벤틀리 부부는 전했다.

가격은 포도 원액의 생산지와 품종에 따라 99달러부터 145달러까지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고객들은 135달러 패키지를 선택한다고 한다. 한 패키지로 29병의 와인을 만들 수 있으며, 모든 재료와 도구가 제공되지만 병은 자신이 가져오든지 스토어에서 판매하는 것을 구입해야 한다. 135달러의 비용으로 29병의 와인을 소유할 수 있다면 병당 5달러가 채 안 되는 가격이므로 부담없이 시도해볼만 하다.


아무리 전문가가 오랜 연구 끝에 마련한 원액과 효모 등 준비물의 비율을 그대로 섞는다고 하지만, 원산지에서 전문가가 직접 참여하여 최고의 기구와 최적의 장소에서 여러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와인보다 맛이 훌륭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와인의 맛은 눈과 코와 혀로만 느낀다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함이 있다. 분명히 똑같은 와인이지만 훨씬 더 맛이 좋았던 장소와 시간과 같이 마신 친구들이 있는 경험을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와인은, 혹은 우리가 만든 와인은, 그래서 눈과 코와 혀로만 느낄 수 있는 맛을 떠나서 훨씬 더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특별함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최선명 객원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