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코르크 vs 스크루캡

2003-01-2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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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상하는것은 코르크 때문”

코르크 산업체들 막강한 로비불구
상할 염려없고 간편한 대체용품 전환

와인을 마시는 것은 하나의 행사이다. 거쳐야 할 순서가 있고 빠뜨릴 수 없는 의식이 있다. 와인을 꺼내와서 레이블을 확인한 후, 호일 커터로 병목을 감싸고 있는 호일을 깔끔하게 잘라내고, 가장 애용하는 와인 오프너로 코르크를 빼낸 후, 코르크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나 확인하고, 잔에 와인을 조금 따라서 힘차게 휘저은 후 냄새를 맡고, 맛을 보아 이상이 없으면 다 같이 마시는 것이다. 이 때, 코르크가 병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울려퍼지는 맑은 소리는 많은 사람을 흥분에 설레이게 하는데 아마도 그것이 코르크의 매력인 것 같다.


몇년 전 소개팅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자주 가는 이탈리아 식당에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이 집은 이게 맛있고, 저건 별로고.. 잔뜩 정보를 제공한 후 자신있게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키안티 한 병을 시켰다.
웨이터가 병을 가지고 와서 레이블을 보여준 후 코르크를 따서 내게 건넸지만 냄새를 맡지 않았다. 어차피 코르크가 상해서 냄새가 나면 와인에도 냄새가 날 것이므로, 나는 냄새맡는 순서를 생략하고 곧바로 와인의 냄새와 맛을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와인에서 텁텁하고 썩은 버섯같은 불쾌한 냄새가 확 났다. 그제서야 코르크를 집어서 냄새를 맡아보니 코르크에서도 바로 그 썩은 버섯 냄새가 났다. 냄새를 맡아본 웨이터가 미안하다며 같은 와인을 새로 한 병 가지고 나왔는데, 또 역시 코르크가 상한 와인이었다.

다행히 세번째 병은 멀쩡하고 맛있었지만, 와인을 두세번 바꾸어 가지고 나오는 동안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코르크 마개를 사용한 모든 와인 중 약 5%가 상한 코르크로 인해 상한 와인이라고 한다. 습도와 온도가 적절한 장소에서 제대로 보관했을 경우 와인이 상할 확률은 거의 없으니, 와인이 상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코르크로 인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5%면 그리 적은 확률이 아니다. 20병을 마시면 1병은 버려야 하는 확률이다. 만약에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하여 수십년간 잘 보관하였다가 결혼 20주년이라던가, 자손의 결혼식이라던가 하는 중요한 날 큰맘먹고 땄는데 코르크가 상한 와인이라면 얼마나 마음이 상할 것인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와인 메이커들은 코르크를 대신할 대용품을 오랫동안 찾아왔다. 그 중 하나가 플래스틱 코르크라고 불리우는 코르크 모양의 플래스틱 마개이다. 야광 주황색 등 화려한 색상도 있지만, 대부분 코르크를 흉내낸 베이지 색깔이 많아서 얼핏 보기엔 잘 구별이 안 간다.

적어도 자연 코르크처럼 상할 염려는 없으므로 코르크의 대용품으로 채택되었고, 나파 밸리의 고급 와이너리 중 하나인 세인트 수퍼리 (St. Supery) 와이너리 등지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신축성과 탄력성이 뛰어난 코르크와는 달리 플래스틱 마개는 뻑뻑하여 잘 빠지지 않고 딱딱하기 때문에 웬만한 오프너의 스크루가 잘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오프너를 사용해서 와인을 따는 과정을 지킬 수 있으므로, 상한 와인의 확률을 줄이면서 와인 마시는 행사를 즐기는 애호가들에게 코르크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코르크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오프너로 코르크를 뽑아내는 번거러움을 거치지 않고 쉽게 딸 수 있는 스크루캡으로 아예 대체하자는 와이너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탄산음료의 뚜껑으로 사용되면서 그 편리함과 성능이 오랫동안 입증된, 돌려따는 스크루캡으로 와인 마개를 대체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자연 코르크가 아닌 플래스틱 마개나, 특히 돌려 따는 스크루캡의 경우 싸구려라는 인식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마케팅 측면에서 보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코르크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코르크 산업과, 코르크를 병에서 빼내는 와인 오프너 산업에서 벌이는 막강한 로비가 와이너리들로 하여금 쉽게 코르크를 버리지 못하게 한다.

오크 나무의 껍질인 코르크는 한 번 벗겨내면 8년 후 다시 벗겨낼 수 있는데, 포르투갈에서는 현재 정부차원에서 코르크 산업을 지원, 감독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약 100년 동안은 코르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런 마당에 와이너리들이 코르크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뉴질랜드, 호주, 남아공 등 와인의 신생지로 각광받고 있는 곳에서 시작된 스크루캡 와인은 이제 미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여름 뉴질랜드의 27개 와이너리가 스크루캡만을 사용하겠다고 발표하였고, 호주의 고급 와인 메이커 펜폴드 (Penfold) 와이너리는 이미 2년 전부터 적포도주 Bin 2에 스크루캡을 사용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작년에 캘리포니아의 소규모 고급 와이너리 플럼잭 (Plumjack)에서 병당 100달러의 고급 적포도주에 스크루캡을 적용하여 판매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점점 더 빠르게 전파되어, 캘리포니아에서 reserve 레이블이 붙은 고급 와인에 스크루캡을 적용하겠다는 와이너리들이 늘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하는 프랑스에서는 아직까지 스크루캡을 적용한 와이너리가 없지만, 2001년 보졸레 누보 중에는 병 꼭지에 스크루캡을 씌울 수 있도록 홈이 파인 병을 사용한 곳도 있었으니 아마도 보졸레 누보를 선두로 서서히 스크루캡이 프랑스에도 전파될 것 같다.

이에 대항하는 포르투갈의 코르크 산업은 최근 홍보 자료를 통해 코르크 공장이 새로 두 곳 문을 열 것이며 첨단 과학 시설로 인해 코르크가 상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와인에 코르크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코르크 산업이 망할 것이고, 수많은 코르크나무가 없어지면 심각한 환경 재해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는 것 같다. 명성있는 와이너리들이 고급 와인에 스크루캡을 적용하는 순간 스크루캡의 물결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질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그렇지만, 코르크가 빠진 와인, 스크루캡을 돌려서 따는 와인을 상상하는 것은 마음 속 어디 한 구석이 아파오는 애련함이 있다. 따고 난 후 와인이 상하지 않았다는데서 오는 안도감과 기쁨도 줄어들 것이고, 코르크를 따는 과정을 생략한 와인 마시기라던가, 와인 셀러에 와인병들이 세워진 채로 보관되는 장면 등은 아직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사라져서 기억으로만 남기 전에 부지런히 와인 오프너로 코르크를 따야겠다.

<최선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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